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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토피카

기투(企投)의 철학, '던져진 존재, 던지는 존재'

by 변리사 허성원 2026. 4. 8.

기투의 철학, '던져진 존재, 던지는 존재'

 

(* 기투(企投, Entwurf)는 하이데거 실존철학의 핵심 개념으로, 인간이 자기에게 주어진 조건 위에서 아직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을 향해 자기를 던지는 존재 방식을 뜻한다. 독일어 entwerfen(앞으로 던지다)에서 온 이 개념은 피투성(被投性, 피던져져 있음)과 짝을 이루며, 인간 존재의 이중 구조를 드러낸다. 우리는 선택하지 않은 시대, 가정, 조건 속에 던져져 있지만, 그 위에서 다시 자기를 미래로 던진다. 소크라테스의 죽음, 간디의 비폭력, 만델라의 27년 감옥, 윤동주의 시 쓰기는 모두 극한의 피투 속에서 본래적 기투를 관철한 사례다. 사르트르는 이를 자유와 동일시했고, 장자는 반대로 모든 기투를 놓아버리는 데서 자유를 보았다. 기투는 단순한 계획이 아니라 존재론적 사건이며, 인간이 사물과 근본적으로 다른 이유다. 우리는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자기를 만들어가는 존재이고, 기투는 바로 그 만들어감의 구조를 가리킨다.)

서론: 왜 기투인가

인간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해 서양 형이상학은 오랫동안 "이성적 동물(animal rationale)"이라 답해왔다. 하이데거는 이 답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보았다. 인간을 "무엇(Was)"으로 규정하는 순간, 인간은 이미 사물처럼 고정된 본질을 가진 존재로 전락한다. 하이데거가 제안한 것은 인간을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Wie)"로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그 답의 핵심에 기투가 있다.

기투는 단순한 철학 용어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삶을 살아가는 방식의 가장 깊은 구조를 가리킨다. 이 글에서는 기투의 개념을 여러 방향으로 확장하고, 다양한 영역의 사례를 통해 이 개념이 가진 현실적 힘을 드러내고자 한다.

'기투'라는 말의 내력

독일어 원어: Entwurf

기투의 원어는 독일어 Entwurf다. 이 단어는 일상 독일어에서는 "설계", "디자인", "초안"을 뜻한다. 건축가가 건물의 초안을 그리는 것, 작가가 소설의 얼개를 잡는 것이 모두 Entwurf다. 동사형 entwerfen은 "ent-(앞으로, 밖으로)"와 "werfen(던지다)"의 합성어로, 글자 그대로는 "앞으로 던지다"라는 뜻이다.

하이데거는 이 일상적 단어를 가져다가 전혀 다른 차원의 의미를 부여했다.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 1927)"에서 Entwurf는 현존재(Dasein)가 자기 존재의 가능성을 향해 자기 자신을 내던지는 존재론적 운동을 가리킨다. 하이데거가 이 단어를 택한 것은 의도적이었다. werfen(던지다)이라는 어근이 피투성(Geworfenheit, 던져져 있음)의 werfen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세계 속에 "던져져(geworfen)" 있으면서 동시에 자기를 "앞으로 던지는(entwerfen)" 존재라는 이중 구조가, 같은 어근의 변주를 통해 언어적으로도 드러나도록 설계한 것이다.

일본어 번역: 投企와 企投

하이데거 철학이 동아시아에 수용되는 과정에서 첫 관문은 일본이었다. 일본의 하이데거 연구자들은 Entwurf를 한자로 옮길 때 두 가지 방식을 시도했다. 하나는 "投企(とうき, 토우키)"이고, 다른 하나는 "企投(きとう, 키토우)"이다.

投企는 "던져서(投) 꾀한다(企)"는 어순이고, 企投는 "꾀하여(企) 던진다(投)"는 어순이다. 일본 학계에서는 投企가 더 널리 쓰이는 편이다. 브리태니커 일본어판에서도 "投企, 企投ともいう(投企라 하며 企投라고도 한다)"라고 병기하고 있다. 일본의 한 철학 블로거는 이 번역어에 대해 흥미로운 관찰을 남겼다. "投企する(투기하다)라는, 일본어적으로는 도저히 수수께끼라고밖에 할 수 없는 역어가 붙은 것은, 하이데거가 이 단어를 특수한 의미를 가진 '하이데거어'로 사용해버렸기 때문에, 차라리 '던지다(投げる)'를 포함한 특수한 말로 번역해버리는 편이 낫겠다고 번역자들이 판단해온 결과"라는 것이다.

이 관찰은 중요한 점을 짚고 있다. Entwurf의 번역은 의미의 전달만이 아니라, 원어가 가진 어원적 울림을 살려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설계"나 "기획"이라고 옮기면 의미는 통하지만, werfen(던지다)과 Geworfenheit(피투성)를 잇는 어근의 연결이 사라진다. 投企 혹은 企投라는 다소 어색한 조어는 바로 이 "던짐(投)"의 감각을 살리기 위한 것이었다.

한국어 번역: 기투(企投)와 역사

한국에서 하이데거 철학의 본격적 수용은 소광희와 이기상, 두 학자의 "존재와 시간" 번역을 통해 이루어졌다. 소광희(전 서울대 교수)의 번역본(경문사)이 먼저 나왔고, 이기상(전 한국외국어대 교수)의 번역본(까치, 1998)이 뒤를 이었다.

Entwurf의 한국어 번역에서 두 학자는 다른 선택을 했다. 소광희는 "기투(企投)"를, 이기상은 "기획투사(企劃投射)" 혹은 "던져 밝힘"이라는 풀어쓴 표현을 병용했다. 한국 학계의 평가를 보면, 2000년대까지는 소광희 역본의 용어가 주로 쓰였으나, 2020년대 들어서는 이기상 역본의 용어 사용이 다소 우세한 상황이다. 이기상이 사용한 용어가 본래 의미를 파악하는 데 더 적절하다는 학계의 평가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번역어는 여전히 "기투(企投)"다. 표준국어대사전에도 "기투"가 표제어로 등재되어 있으며, "현재를 초월하여 미래에로 자기를 내던지는 실존의 존재 방식"이라고 풀이되어 있다. 한국어 "기투"는 일본어 "企投(きとう)"의 한자를 그대로 가져온 것으로, 일본을 경유한 서양 철학 수용의 전형적 경로를 보여준다.

번역어에 담긴 철학적 문제

기투라는 번역어 자체가 하나의 철학적 문제를 품고 있다. "企(꾀하다)"는 의도성과 계획성을 함축한다. "投(던지다)"는 신체적 행위의 역동성을 함축한다. 이 두 글자의 결합은 "의도적으로 던진다"는 뉘앙스를 만들어낸다.

그런데 하이데거의 Entwurf에서 "던짐"은 반드시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것이 아니다. 하이데거는 "현존재는, 이제부터 기투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이미 기투해버리고 있다"고 말한다. 기투는 의식적 결단 이전에 이미 일어나고 있는 존재론적 사건이다. 이 점에서 "企(꾀하다)"라는 글자는 하이데거의 의도를 다소 왜곡할 수 있다. "꾀한다"는 것은 의식적 계획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이기상이 "던져 밝힘"이라는 풀어쓴 표현을 시도한 것도 이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던져 밝힘"은 기투가 단순한 계획이 아니라 존재의 가능성을 "밝히는(erschliessen)" 사건임을 드러내려는 시도다.

결국 "기투"라는 두 글자 안에는 원어 Entwurf의 풍부한 의미가 압축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번역이라는 행위가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의미의 변형과 축소가 일어나고 있다. 기투라는 말을 사용할 때 우리는 이 사실을 의식하고 있어야 한다. 번역어는 원어를 향한 창(窓)이면서 동시에 원어를 가리는 벽(壁)이기도 하다.

1. 기투의 존재론적 구조: 피투성과의 변증법

1-1. 던져짐과 던짐의 이중 운동

인간 존재는 두 겹의 "던짐"으로 구성된다. 첫째는 피투성(Geworfenheit), 즉 내가 선택하지 않은 채 이미 던져져 있는 상황이다. 둘째는 기투(Entwurf), 즉 그 상황 위에서 자기를 가능성 쪽으로 던지는 운동이다.

이 둘은 분리될 수 없다. 피투 없는 기투는 공허한 몽상이고, 기투 없는 피투는 맹목적 운명이다. 인간은 언제나 "던져진 기투(geworfener Entwurf)"로서 존재한다. 이것이 하이데거 실존론의 핵심 구조다.

비유하자면 이렇다. 바다 한가운데 던져진 사람이 있다. 바다를 선택한 적 없다. 파도의 높이도, 수온도, 조류의 방향도 자기가 정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어딘가를 향해 헤엄쳐야 한다. 어느 방향으로 헤엄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 그것이 기투다. 다만 그 결정은 바다의 조건을 무시한 채 이루어질 수 없다. 조류를 읽고, 체력을 가늠하고, 보이는 섬의 방향을 판단하면서 자기를 던져야 한다.

1-2. 사실성과 초월의 긴장

기투의 본질은 초월(Transzendenz)이다. 여기서 초월이란 종교적 의미가 아니라, 지금 여기의 사실적 조건을 "넘어섬(uber-steigen)"이라는 뜻이다. 현존재는 늘 자기가 현재 있는 곳을 넘어서 있다. 아직 도래하지 않은 가능성 속에 이미 가 있다.

그러나 이 초월은 사실성(Faktizitat)이라는 무게를 짊어진 초월이다. 우리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것이 아니라, 유한한 가능성의 장 안에서 기투한다. 이 유한성이야말로 기투에 진지함과 무게를 부여하는 것이다. 만약 가능성이 무한하다면, 어떤 선택도 진정한 결단이 될 수 없다. 유한하기 때문에, 하나를 택한다는 것은 다른 것을 포기한다는 것이고, 그래서 기투는 언제나 일종의 희생을 수반한다.

2. 기투의 양태: 본래적 기투와 비본래적 기투

2-1. 비본래적 기투: 세인(das Man)의 방식

하이데거는 대부분의 인간이 대부분의 시간 동안 비본래적(uneigentlich) 방식으로 기투한다고 보았다. 이것은 도덕적 비난이 아니라 구조적 기술이다. 비본래적 기투란 "남들이 하니까", "원래 그런 거니까", "상식적으로 그래야 하니까"라는 방식으로 자기 가능성을 선택하는 것이다.

세인의 기투에서 결정의 주체는 "아무도 아닌 모든 사람"이다. 명문대에 가고, 대기업에 취직하고, 적당한 나이에 결혼하고, 집을 사고, 노후를 준비하는 삶의 경로가 마치 자연법칙처럼 주어져 있다. 이 경로를 따라갈 때 우리는 기투의 불안으로부터 보호받는다. 선택의 무게가 분산되기 때문이다.

2-2. 본래적 기투: 결단성과 양심의 부름

본래적(eigentlich) 기투는 세인의 안전망을 벗어나 자기 고유의 가능성을 향해 자신을 던지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것을 "결단성(Entschlossenheit)"이라 불렀다. 결단성이란 닫혀 있던 것을 여는 것(Ent-schlossenheit, "열어젖힘")이다. 세인에 의해 닫혀 있던 자기 고유의 가능성을 열어젖히는 것이다.

이 열어젖힘을 촉발하는 것이 양심의 부름(Ruf des Gewissens)이다. 하이데거의 양심은 도덕적 양심이 아니다. 그것은 현존재가 자기 자신에게 "네가 지금 세인의 소음 속에 파묻혀 있다"고 말 없이 알려주는 소리다. 양심은 아무 내용도 말하지 않는다. 무엇을 해야 한다고 지시하지 않는다. 단지 "네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킬 뿐이다.

3. 기투의 역사적, 실존적 사례

3-1. 소크라테스: 죽음 앞에서의 기투

소크라테스의 재판과 죽음은 본래적 기투의 원형적 사례다. 기원전 399년, 아테네 법정은 그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친구들은 탈출을 권했다. 크리톤은 돈과 경로까지 준비해 두었다. 소크라테스 앞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열려 있었다. 도망쳐서 목숨을 부지하는 것, 혹은 남아서 독배를 마시는 것.

소크라테스는 남았다. 이것은 죽음을 사랑해서가 아니었다.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평생 말해온 자기 자신의 가능성, 즉 "진리를 향해 묻는 존재"로서의 자기를 끝까지 관철하기 위해서였다. 도망치는 순간, 그가 평생 던져온 기투의 전체가 무너진다. 그의 죽음은 기투의 완성이었다. 죽음을 통해 그의 삶 전체가 하나의 일관된 의미를 획득했다.

플라톤의 "파이돈"에서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들기 직전 보여주는 평온함은, 자기 기투에 대한 흔들림 없는 확신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자기가 던진 방향이 옳다는 것을 알았고, 그 방향의 끝이 죽음이라 해도 방향을 바꾸지 않았다.

3-2. 간디: 피투된 식민지와 비폭력이라는 기투

모한다스 간디는 인도라는 식민지에 태어났다. 이것은 그의 피투성이다. 영국의 지배, 카스트 제도, 종교 간 갈등, 가난. 이 모든 조건을 그가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런던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남아프리카에서 변호사로 일하던 청년 간디 앞에는 여러 가능성이 열려 있었다. 영국 체제 안에서 출세하는 삶, 인도로 돌아가 부유한 변호사가 되는 삶, 혹은 무장 독립투쟁에 뛰어드는 삶.

간디가 택한 기투는 이 모든 기존의 가능성 지평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비폭력 저항(아힘사, 사티아그라하)이라는 전혀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자기를 던졌다. 이것은 당시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기투였다. 무력으로 맞서지 않으면서 어떻게 제국을 물리치겠는가. 그러나 간디는 "진리를 붙잡는 것(사티아그라하)"이라는 가능성이 폭력보다 강하다는 데 자기 존재를 걸었다.

소금 행진(1930)은 이 기투가 역사적 사건으로 현실화된 순간이다. 바닷물에서 소금을 만드는 행위, 그 자체로는 보잘것없는 일이 제국의 근간을 흔드는 사건이 되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간디의 기투가 단순한 전략이 아니라 존재 전체를 건 결단이었기 때문이다.

3-3. 카프카: 글쓰기라는 기투와 실존의 분열

프란츠 카프카의 삶은 기투의 고통스러운 측면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카프카는 프라하의 유대인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헤르만 카프카는 아들이 안정된 직업을 갖기를 원했고, 카프카는 실제로 노동자 상해보험공사에서 관료로 일했다. 이것이 그의 피투된 조건이었다.

그러나 카프카의 본래적 기투는 글쓰기를 향해 있었다. 문제는 이 두 기투가 화해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낮에는 관료로서 비본래적 기투를 수행하고, 밤에는 작가로서 본래적 기투에 몸을 던지는 이중생활. 카프카는 1913년 일기에 이렇게 썼다. "나의 직업은 나에게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의 유일한 욕망, 나의 유일한 소명인 문학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변신"의 그레고르 잠자가 어느 날 아침 벌레로 변해 있는 것은, 비본래적 기투(가장으로서 돈을 버는 삶) 속에서 본래적 자기를 완전히 상실한 인간의 존재론적 초상이다. 벌레가 된 것은 물리적 사건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에 완료된 자기 상실이 마침내 가시화된 것이다. 잠자는 기투 없는 인간, 즉 타인의 기대를 살아가는 도구로 전락한 현존재의 극단적 비유다.

반면 "성(Das Schloss)"의 측량사 K.는 끊임없이 성에 도달하려 하지만 결코 도달하지 못한다. 이것은 기투의 또 다른 진실을 보여준다. 기투는 반드시 성공하는 것이 아니다. 가능성을 향해 자기를 던진다고 해서 그 가능성이 실현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K.는 포기하지 않는다. 도달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던지기를 계속하는 것, 이것이 기투의 비극적 위엄이다.

3-4. 만델라: 27년간의 감옥이라는 피투 속에서의 기투

넬슨 만델라는 1964년 종신형을 선고받고 로벤 섬 감옥에 수감되었다. 27년이라는 시간이 그에게 주어진 피투성이었다. 좁은 감방, 강제 노역, 가족과의 단절, 늙어가는 육체. 이 조건들은 대부분의 인간에게 기투의 가능성 자체를 봉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만델라는 감옥 안에서 기투를 멈추지 않았다. 그의 기투는 "남아프리카의 인종 화해"라는 가능성을 향해 있었고, 이 기투는 감옥의 벽에 의해 제한되지 않았다. 그는 감옥에서 아프리칸스어를 배웠다. 적의 언어를 익힌 것이다. 이것은 전략적 계산이기도 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적을 적으로만 보지 않는 존재"를 향한 기투였다. 그는 간수들과 대화하고, 그들의 럭비 경기 결과에 관심을 보이고, 그들을 인간으로 대했다.

1990년 석방된 뒤 만델라가 보여준 화해의 정치는 감옥에서의 기투가 꽃을 피운 것이었다. 진실과 화해 위원회(TRC)의 설치, 럭비 월드컵을 통한 인종 통합의 상징 만들기. 이 모든 것은 27년간 감옥이라는 극한의 피투성 속에서 포기하지 않고 유지한 기투의 결실이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시간의 문제다. 27년은 인간의 생애에서 거대한 시간이다. 대부분의 기투는 그보다 훨씬 짧은 시간 안에 좌절하거나 변질된다. 만델라의 사례는 기투가 시간의 시험을 견디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동시에 그것을 견뎌냈을 때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를 보여준다.

3-5. 마리 퀴리: 과학적 기투와 사회적 피투의 충돌

마리 퀴리의 삶은 기투가 사회적 피투성과 어떻게 충돌하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 사례다. 19세기 말 폴란드 여성으로 태어난 것, 여성에게 대학 입학이 허용되지 않는 사회에 살고 있었던 것, 가난한 집안이었던 것. 이 모든 것이 그녀의 피투성이었다.

퀴리의 기투는 "방사능의 본질을 규명하는 존재"를 향해 있었다. 이 기투를 실현하기 위해 그녀는 먼저 피투된 조건 자체를 변형해야 했다. 폴란드를 떠나 파리로 갔고, 소르본 대학에 입학했고, 추위와 배고픔 속에서 공부했다. 피에르 퀴리와의 결혼은 사랑이기도 했지만, 과학적 기투를 함께 수행할 동반자를 얻은 것이기도 했다.

1903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 당시, 위원회는 처음에 피에르만 수상자로 지명하려 했다. 여성 과학자라는 존재 자체가 당대의 세인이 상상할 수 있는 가능성의 지평 밖에 있었기 때문이다. 피에르의 항의로 마리가 공동 수상했지만, 이 에피소드는 기투가 세인의 저항에 부딪히는 전형적 양상을 보여준다.

피에르 사후, 마리는 홀로 연구를 계속했고 1911년 두 번째 노벨상(화학상)을 받았다. 그러나 같은 해, 물리학자 폴 랑주벵과의 관계가 언론에 폭로되면서 프랑스 사회의 격렬한 비난에 직면했다. 외국인 여성이 프랑스 남성의 가정을 파괴했다는 비난. 여기서 다시 피투성이 기투를 짓누른다. 성별, 국적, 사회적 도덕이라는 피투된 조건이 그녀의 과학적 기투를 위협했다.

그러나 퀴리는 기투를 포기하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이동식 엑스레이 장치를 개발하여 전선의 부상병들을 도왔다. 과학적 기투가 인도주의적 기투로 확장된 것이다. 그녀는 결국 방사능 물질에 의한 재생불량성 빈혈로 사망했다. 자기 기투의 대상이 자기 생명을 앗아간 셈이다. 이것은 기투의 비극적 아이러니이면서, 동시에 기투의 진정성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녀는 안전한 거리에서 방사능을 "연구"한 것이 아니라, 자기 존재 전체를 그 안에 던져 넣었다.

3-6. 윤동주: 식민지 청년의 시적 기투

윤동주는 1917년 만주 북간도에서 태어났다. 조선인이면서 일본 제국의 신민이라는 이중의 피투성 속에 있었다. 식민지 청년이 할 수 있는 기투의 범위는 극도로 제한되어 있었다. 독립운동에 뛰어들 것인가, 체제에 순응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길이 있는가.

윤동주의 기투는 시를 쓰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문학적 야심이 아니었다. 그의 시는 존재론적 자기 심문의 기록이다. "서시"에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이라고 쓸 때, 이것은 식민지라는 피투성 속에서 자기 존재의 순결함을 향해 기투하겠다는 선언이다.

"자화상"에서 우물 속의 자기를 들여다보는 행위는 하이데거적 의미에서의 양심의 부름에 대한 응답이다. 자기가 누구인지,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를 묻는 것. 세인의 소음을 걷어내고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것. 윤동주의 시 전체가 이 대면의 기록이다.

그는 1943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45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사망했다. 해방 6개월 전이었다. 그의 시는 사후에 출간되었고, 그의 기투는 죽음 이후에야 비로소 그 전모를 드러냈다. 이것은 기투의 시간성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기투의 의미는 반드시 기투하는 당사자의 생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때로 기투는 죽음 이후에, 타인의 수용과 해석을 통해 비로소 의미를 획득한다.

3-7. 체 게바라: 혁명적 기투의 빛과 그림자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는 아르헨티나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의대를 졸업한 청년이었다. 의사라는 안정된 기투가 그 앞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남미 대륙을 오토바이로 횡단하면서(1952) 그는 라틴아메리카의 빈곤과 불의를 목도했고, "의사"라는 기투를 접고 "혁명가"라는 기투를 향해 자기를 던졌다.

쿠바 혁명의 성공(1959) 이후 그는 정부의 고위직을 맡았지만, 관료화된 혁명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래서 다시 던졌다. 콩고로, 볼리비아로. 그의 마지막 기투는 볼리비아의 산악지대에서 게릴라전을 수행하는 것이었고, 1967년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체 게바라의 사례는 기투의 양면성을 보여준다. 한편으로 그의 삶은 안락한 비본래적 기투를 거부하고 자기가 옳다고 믿는 가능성을 향해 존재 전체를 던진 본래적 기투의 전형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의 혁명적 기투는 폭력을 수반했고, 그 폭력은 다른 인간의 기투를 봉쇄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기투가 본래적이라고 해서 반드시 윤리적이라는 보장은 없다. 이것이 하이데거 철학의 한계이기도 하고, 동시에 기투 개념을 윤리적 차원에서 재검토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4. 기투의 철학적 확장

4-1. 사르트르: 자유라는 형벌로서의 기투

사르트르는 하이데거의 기투 개념을 받아들이면서 결정적으로 변형했다. 하이데거에게 기투는 존재론적 구조, 즉 현존재가 존재하는 "방식"이었다. 사르트르에게 기투는 자유 자체와 동일시된다. 인간은 "자유롭도록 선고받은" 존재이며, 기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조건이다.

사르트르의 유명한 예시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한 청년이 사르트르를 찾아왔다. 그의 형은 독일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어머니는 아들만 바라보고 살고 있다. 청년은 레지스탕스에 참여해 형의 복수를 하고 프랑스를 위해 싸울 것인가, 아니면 어머니 곁에 남아 홀로 된 어머니를 돌볼 것인가를 결정해야 했다.

사르트르는 답을 주지 않았다. 어떤 도덕 체계도 이 상황에서 확실한 답을 줄 수 없다. 칸트의 정언명법도, 공리주의적 계산도, 기독교 윤리도 이 구체적 상황에서는 양쪽 모두를 정당화할 수 있다. 결국 청년은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그 선택이 곧 그가 어떤 인간인지를 결정한다. 이것이 사르트르적 기투다. 선택을 통해 자기 자신을 창조하는 것이다.

여기서 사르트르가 하이데거와 갈라지는 지점이 있다. 하이데거에게 기투는 "존재의 진리"를 향해 열려 있는 것이지만, 사르트르에게는 그런 존재의 진리 같은 것이 없다. 있는 것은 오직 자유와 선택뿐이다. 이것이 사르트르 실존주의의 냉혹함이자 위엄이다.

4-2. 키르케고르: 불안과 도약으로서의 기투

하이데거 이전에 기투의 원형을 제시한 사람은 키르케고르다. 키르케고르는 "기투"라는 용어를 쓰지 않았지만, 그의 "도약(Sprung)" 개념은 기투와 본질적으로 같은 구조를 가진다.

키르케고르에 따르면 인간의 실존은 세 단계를 거친다. 심미적 단계(감각적 쾌락의 추구), 윤리적 단계(도덕적 의무의 수행), 종교적 단계(신 앞에 선 단독자). 각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의 이행은 논리적 추론이나 점진적 발전이 아니라, "도약"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 도약이 곧 기투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러 모리아 산에 오르는 것은,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신앙의 도약"의 극단적 사례다. 윤리적으로 보면 이것은 살인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윤리를 넘어서는 차원을 향해 자기를 던졌다. 키르케고르는 이것을 "윤리적인 것의 목적론적 정지"라 불렀다. 기투가 기존의 모든 합리적 기준을 정지시키고 전혀 새로운 차원으로 뛰어드는 것, 이것이 도약이다.

4-3. 아렌트: 정치적 기투로서의 행위

한나 아렌트는 기투의 개념을 정치적 영역으로 확장했다. 아렌트에게 인간의 가장 고유한 활동은 "행위(Handeln)"이며, 행위란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능력(Natalitat)"이다. 이것은 기투의 정치적 번역이다.

아렌트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태어남으로써 세계에 "새로운 시작"을 가져온다. 그리고 행위를 통해 이 시작의 능력을 실현한다. 행위는 예측 불가능하고 되돌릴 수 없으며, 행위자의 의도를 넘어서는 결과를 낳는다. 이것은 기투의 구조와 정확히 일치한다. 기투 역시 미리 결과를 알 수 없고, 한번 던지면 되돌릴 수 없으며, 던진 자의 의도를 넘어서는 의미를 산출한다.

미국 독립혁명은 아렌트가 즐겨 든 사례다. 건국의 아버지들은 군주제를 타도하고 공화정을 세운다는 기투를 감행했다. 그러나 그들이 기투한 것의 최종적 의미가 무엇인지는 그들 자신도 완전히 알지 못했다. 그 의미는 이후 수백 년에 걸쳐, 남북전쟁과 노예해방, 여성 참정권, 민권운동 등을 통해 계속 확장되고 변형되어 갔다. 기투는 한 번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후의 기투들에 의해 계속 재해석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다.

4-4. 니체: 자기 극복으로서의 기투

니체는 기투라는 말을 쓰지 않았지만, 그의 "자기 극복(Selbstuberwindung)" 개념은 기투의 가장 급진적 형태를 제시한다. 니체에게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무엇"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인간은 동물과 위버멘쉬(Ubermensch) 사이에 걸린 밧줄이며, 심연 위의 건너감이다.

이 "건너감"이 곧 기투다. 그런데 니체의 기투는 하이데거의 기투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하이데거의 기투는 "자기 고유의 가능성"을 향한 것이지만, 니체의 기투는 "자기 자신마저 넘어서는 것"을 향한다. 지금의 나를 극복하고 아직 존재하지 않는 나를 향해 던지는 것.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영원히 반복되는 던짐. 이것이 영원회귀와 결합된 니체적 기투의 구조다.

5. 기투의 동양적 대응 개념

5-1. 유가: 입지(立志)와 극기복례(克己復禮)

유가 전통에서 기투에 가장 가까운 개념은 입지(立志), 즉 "뜻을 세우는 것"이다. 공자는 "나는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세웠다(吾十有五而志于學)"고 했다. 이 "뜻을 세움"은 하이데거의 기투와 구조적으로 유사하다. 아직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성인, 군자)을 향해 자기를 던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가적 기투에는 하이데거에게 없는 요소가 있다. 그것은 "돌아감(復)"의 차원이다. 극기복례, 즉 자기를 이기고 예(禮)로 돌아간다. 유가적 기투는 전혀 새로운 것을 향해 던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도(道)로 돌아가는 것이다. 미래를 향한 투사이면서 동시에 근원을 향한 회귀다. 이 점에서 유가적 기투는 하이데거적 기투의 미래 지향성과 대비된다.

왕양명의 "치양지(致良知)"도 같은 맥락이다. 양지는 이미 마음속에 있다. 새로 만들어야 할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을 실현해야 한다. 기투의 방향이 외부의 새로운 가능성이 아니라 내면의 본래성을 향해 있는 것이다.

5-2. 도가: 무위(無爲)와 반기투

장자의 "무위(無爲)"는 기투의 정반대처럼 보인다. 기투가 "자기를 던지는 것"이라면, 무위는 "던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좀 더 깊이 보면, 무위는 기투의 부정이 아니라 기투의 다른 양식이다.

장자의 포정(庖丁)을 보라. 소를 해체하는 백정 포정은 칼을 대지 않는 듯하면서 소를 완벽하게 해체한다. "신(神)으로 만나고 눈으로 보지 않는다." 이것은 의도적 기투를 넘어선 경지다. 자기를 어떤 목표를 향해 의식적으로 던지는 것이 아니라, 상황 자체가 자기를 통해 흘러가도록 하는 것. 기투의 주체가 해소된 상태에서의 기투, 즉 "주체 없는 기투"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하이데거 후기 철학의 "내맡김(Gelassenheit)"과 놀라운 유사성을 보인다. 후기 하이데거는 인간이 존재를 향해 자기를 던지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자기를 열어 보이도록 내맡겨야 한다고 보았다. "존재와 시간"의 기투가 전기 하이데거의 핵심이라면, 내맡김은 후기 하이데거의 핵심이다. 흥미롭게도, 이 후기 하이데거의 전환은 장자가 이미 가 있던 곳으로의 접근이라고도 읽을 수 있다.

5-3. 불교: 발원(發願)과 보살의 기투

대승불교의 "발원(發願)"은 기투의 불교적 형태다. 보살은 "일체중생을 구하겠다"는 원(願)을 세운다. 이것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일체중생의 구제)을 향해 자기 존재를 던지는 것이다.

그런데 보살의 기투에는 역설이 있다. 금강경에서 "중생을 제도하되 제도한 중생이 없다(滅度無量無數無邊衆生 實無衆生得滅度者)"고 한다. 기투하되 기투의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것. 가능성을 향해 던지되, 그 가능성의 실현 여부에 자기를 매달지 않는 것. 이것은 하이데거적 기투와도, 사르트르적 기투와도 다른 제3의 구조다. 기투의 에너지는 유지하되 기투의 집착은 놓는 것. 이것이 반야(般若)의 지혜가 기투에 가져다주는 변형이다.

6. 기투의 현대적 함의

6-1. 기술 시대와 기투의 위기

현대 기술 문명은 기투의 조건 자체를 변형시키고 있다. 알고리즘이 우리의 취향을 분석하고, AI가 진로를 추천하고, 소셜 미디어가 "당신은 이런 사람입니다"라고 규정하는 시대에, 진정한 기투는 가능한가?

하이데거는 이미 기술(Technik)의 본질이 "닦아세움(Gestell)"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닦아세움이란 존재자를 부품(Bestand)으로 환원하는 것이다. 강물은 수력발전의 자원으로, 숲은 목재의 원천으로, 인간은 인적자원으로 환원된다. 이 환원 속에서 인간의 기투 역시 "커리어 플래닝", "자기 브랜딩", "인생 로드맵" 같은 기술적 용어로 번역되고 관리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기투는 관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투는 본질적으로 불확실성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며, 관리와 통제의 논리는 이 불확실성을 제거하려 한다. 기투를 관리하려는 시도가 바로 기투의 비본래화다.

6-2. 기투와 책임

기투는 자유와 불가분하지만, 동시에 책임과도 불가분하다. 자기를 어떤 가능성으로 던진다는 것은 그 결과에 대해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르트르가 말했듯, "나를 선택함으로써 나는 인간을 선택한다." 나의 기투는 나만의 일이 아니라,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하나의 증언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기투는 윤리학의 근본 문제와 만난다. 어떤 기투가 좋은 기투인가? 하이데거는 이 물음에 답하지 않았고, 사르트르는 "선택 자체가 가치를 창조한다"고 답했다. 그러나 체 게바라의 사례에서 보았듯, 본래적 기투가 반드시 좋은 기투는 아니다. 기투의 존재론적 구조와 기투의 윤리적 평가는 별개의 문제이며, 이 간극을 메우는 것이 철학의 과제로 남아 있다.

7. 결어: 던짐의 용기

기투의 핵심은 결국 용기의 문제다. 아직 확실하지 않은 것을 향해 자기를 던지는 것, 결과를 보장받지 못한 채 뛰어드는 것, 세인의 안전한 해석을 벗어나 자기만의 길을 가는 것. 이 모든 것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 용기는 무모함과 다르다. 기투의 용기는 자기 유한성에 대한 자각, 피투된 조건에 대한 정직한 직시,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겠다는 결단 위에 서 있다. 소크라테스의 평온, 간디의 인내, 만델라의 끈기, 윤동주의 맑음, 퀴리의 집요함. 이 모든 것이 기투의 용기가 취하는 서로 다른 형태들이다.

인간은 기투하는 존재다.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무엇을 향해 던지느냐, 그리고 그 던짐에 자기 존재 전체를 걸 수 있느냐이다. 이것이 기투라는 개념이 우리에게 던지는 물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