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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토피카

'하여가(何如歌)'와 '단심가(丹心歌)'

by 변리사 허성원 2025. 6. 12.
 

'하여가(何如歌)'와 '단심가(丹心歌)'

 

하여가(何如)는 조선 태종 이방원이 고려 시절 포은 정몽주를 회유하기 위해서 정몽주를 초대한 자리에서 지어 부른 시조이다.
이에 응답하여 정몽주는
단심가(丹心歌)를 통해 거절의 뜻을 전했다.
그로 인해 이방원의 부하 조영규와 고여에게 개성 선지교(善地橋)에서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선지교는 후에 그가 숨진 자리에서 대나무가 자라
선죽교(善竹橋)라 불리게 되었다.

단심가는 조선조 개국과정에서 반대파의 주장을 대변하였지만, 조선조가 내세운 유교적 지배질서와 부합하였기에, 조선의 개국 후에는 신하의 충성심을 나타내는 노래로 널리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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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가(何如歌) – 이방원>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럼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이런들 엇더ᄒᆞ며 져런들 엇더ᄒᆞ료
만수산(萬壽山) 드렁츩이 얼거진들 엇더ᄒᆞ리
우리도 이ᄀᆞᆺ치 얼거져 백년(百年)ᄭᆞ지 누리리라34.

此亦何如 彼亦何如
城隍堂後垣 頹落亦何如
我輩若此爲 不死亦何如

(또는 『해동악부』 등에 따라 전하는 한역이 다소 다를 수 있다. 주로 城隍堂後垣(성황당후원) 대신 萬壽山(만수산) 드렁칡 얽힘에 비유하기도 한다. 한역본에 따르면 '성황당 뒷담이 무너진들 어떠하리'가 된다. 대표적으로 『포은집』에는 아래와 같이 전해진다.)

此亦何如 彼亦何如
城隍堂後垣 頹落亦何如
我輩若此爲 不死亦何如34

(만수산 드렁칡 얽힘에 대해서는 한역이 직접적으로 없으므로, 해석상으로만 참고)


<단심가(丹心歌) – 정몽주>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백골(白骨)이 진토(塵土)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一片丹心)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12.

此身死了死了 一百番更死了
白骨爲塵土 魂魄有也無
向主一片丹心 寧有改理也歟12

(또는)
此身死了死了 一百番更死了
白骨爲塵土 魂魄有也無
向主一片丹心 寧有改理與之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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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원은 조선 건국에 공이 큰 태종으로, 이 작품은 반대당인 정몽주(鄭夢周)의 진심을 떠보고 회유하기 위하여 마련된 자리에서 지어 부른 작품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런들 엇더ᄒᆞ며 져런들 엇더ᄒᆞ료/만수산(萬壽山) 드렁츩이 얼거진들 엇더ᄒᆞ리/우리도 이ᄀᆞᆺ치 얼거져 백년(百年)ᄭᆡ지 누리리라.” 『해동악부(海東樂府)』와 『포은집(圃隱集)』에는 한역되어 전한다(此亦何如 彼亦何如 城隍堂後垣 頹落亦何如 我輩若此爲 不死亦何如).

이에 대하여 정몽주는 「단심가(丹心歌)」를 지어 응수하였다. 이 두 작품은 「하여가」가 직설적인 말을 피하고 우회적 기교로 여유롭고 느긋함에 비하여 「단심가」는 직설적이고 단정적인 표현으로 굳은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즉 이방원은 얽힘의 논리로 화해와 조화를 희구하고 있는데, 정몽주는 죽음의 논리로 의지와 단절을 노래하고 있어, 당시 두 사람이 처한 입장, 곧 지략적인 정치가와 비타협적인 학자의 면모가 잘 나타나 있다."

 

하여가(何如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ncykorea.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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