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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習_아테나이칼럼/천리마리더십

[허성원 변리사 칼럼]#149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by 변리사 허성원 2024. 2. 19.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이제 두 사람은 하늘에선 비익조(比翼鳥)가 되고 땅에선 연리지(連理枝)가 되듯이 영원히 한 몸 한마음이 되어 변함없는 사랑을 지켜 가시길 빕니다." 어느 결혼식에서 들은 주례사의 마무리 말씀이다. 비익조와 연리지는 당나라의 시인 백거이(白居易)장한가(長恨歌)’에 언급되어 있다. 당현종과 양귀비의 뜨겁고도 슬픈 사랑을 그렇게 묘사하였다. 비익조의 암수는 날개가 각자 하나 뿐이라 서로 합쳐야만 날 수 있고, 연리지는 서로 다른 나무의 가지가 붙어 한 몸이 되어버린 것이다. 언제나 함께 하고 싶은 아름다운 사랑이 그려진다.

저렇게 두 주체가 온전히 한 몸이 되어 하나로 살아가야 하는 삶은 어떨까. 순간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 주례 선생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혹시 그렇게 살아오셨나요? 저 신혼부부가 정녕 그런 삶을 살길 바라시나요? 나라면 그렇게 살라고 말하지는 못할 것 같다. 어찌 서로 다른 인간이 언제까지나 그렇게 하나로 붙어서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비익조는 본 적이 없지만, 바람이 많은 제주도의 숲속 등에 가면 연리지는 아주 드물지는 않다. 저 연리지들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상상해본다. 가까이 사는 두 나무에 거센 바람이 분다. 서로 부딪치며 상처를 주고받고, 채 아물기도 전에 같은 자리에 더 큰 상처를 주며 할퀴고 도려낸다. 그럼에도 그들은 떠날 수도 밀어낼 수고 없다. 또 바람이 불면 더 큰 상처를 내고 바람이 잘 때 부둥켜안고 있다가 어느 날 자신도 모르게 하나가 되어 버렸다. 지독한 바람과 극심한 상처가 그들을 영원히 하나로 묶어버렸다. 설마 그런 삶을 원하는가.

본래 인간도 연리지처럼 사실상 두 사람이 하나로 합쳐진 생명체였다고 한다. 플라톤의 향연에서 아리스토파네스가 한 말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원래 머리 둘과 팔 넷, 다리 넷을 가진 완전한 생명체였는데, 무서운 힘과 기운을 가졌기에 신들을 공격하고 하늘에 오르려 했다. 그 오만함을 두고 볼 수 없었던 제우스는 그들을 반으로 쪼개 버렸다. 그리하여 반쪽이 되어버린 인간은 다른 반쪽을 다시 만나 완전해지기를 갈망하며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이야기에서 인간은 둘로 나뉠 때 많이 슬펐을 것이다. 힘도 약해지고 짝이 떨어져나갔으니 그 좌절과 허전함이 주는 아픔은 짐작이 간다. 그러다 어느 날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가 나타나서 다시 하나로 결합시켜 주겠다고 한다면 어떨까? 아리스토파네스는 기꺼이 그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고 하였다. 하지만 이미 독립된 삶을 살아본 반쪽 인간들이 그 제안을 반기며 받아들일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데 나는 한 표를 던지겠다.

그건 23각 달리기를 한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안다. 아무리 친하고 마음이 잘 맞는 친구 사이라 해도 도통 제대로 발을 맞출 수가 없다. 상당한 시간을 들여 지지고 볶고 연습하면 좀 나아지긴 하겠지만, 아무래도 각자 따로 달리는 것에는 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삶이란 게 항상 길에서만 달리는 게 아니다. 산에도 오르고 물에서도 헤엄쳐야 할 때도 있을 텐데, 그러다 서로 묶인 둘은 사랑은커녕 원수가 되어버릴 지도 모른다.

그리고 서로가 똑같다고 한다면 그건 더욱 악몽과 같은 일이다. 내 아내가 나하고 똑 같아서, 나처럼 음침하고 성질 더럽고 코 골고 매사에 칠칠맞게 처신하고 다닌다면, ~ 그건 정말 견딜 수 없는 일이다. 그나마 나보다 좀 더 밝고 약간 더 착하고 더 이해하고 달리 보고 세세하게 잘 챙기니 집안이 제 모습을 갖추고 유지되는 거 아닌가. 싸우다가 내가 삐쳐 옆방으로 달아나도 좀 있다 베개를 들고 슬그머니 옆자리에 파고 들어와주기에 아직도 내가 홀아비가 되지 않고 버젓이 사람행세하며 살 수 있는 거다.

그래서 서로 다른 존재가 그 다름을 온전히 가진 채로 함께할 때 그것이야말로 진정 아름다운 일이다. 이 점도 사실 젊을 땐 전혀 몰랐다. 이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뒤늦게 깨달은 삶의 지혜다. 젊을 땐 서로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는 이유로 얼마나 싸웠던가. 이제 모든 독립된 개체는 귀하디귀하다는 것을 절실히 알고 있다. 모든 인간 개체는 스스로 생각하고 자라고 도전하며, 그러다 스스로 좌절하고 배우고 성숙해가는 그런 아름다운 존재이기에, 그 존재만으로도 존중 받아야 하고, 더욱이 그 각자가 가진 고유의 다름은 더욱 귀한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한다는 이유로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하려 하고, 결국 하나가 되려 한다. 그런데 그 '하나'는 누구의 옳음을 따를 것인가. 그러니 무턱대고 하나가 되려 하는 것은 상대를 그리고 서로를 극도로 구속하는 어리석은 생각이다. 너무 가까우면 볼 수 없다. 그래서 사랑에는 적절한 거리가 필요하다. '거리' '사이 공간' 그 자체가 바로 함께함의 이유이며 동시에 '함께'를 살리는 생명이다.

나와 가장 가깝게 지내는 후배의 아들 인석이가 사랑스런 제 짝을 만나 이번 주말에 결혼식을 한다. 그 아름다운 결혼을 축하하고 행복한 미래를 축원하면서 내가 무슨 말을 해주면 좋을까를 생각하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그 새로운 부부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시가 있다. 칼릴 지브란의 시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이다. 수시로 읽고 되뇌며 부부의 사랑을 야물게 다져가길 기대한다.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리하여 너희 사이에 하늘 바람이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사랑으로 구속하지 마라/ 그보다 너희 영혼들의 기슭 사이에 바다가 출렁이게 하라// 서로의 잔을 채우되 하나의 잔만 마시지는 말라/ 서로 빵을 주되 한쪽의 빵만 먹지 말라//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되/ 서로 혼자 있게 하라/ 마치 현악기의 줄들이 하나의 음악을 울릴지라도/ 줄은 서로 홀로이듯이// 서로 심장을 주되/ 서로의 심장에 머물러 있지 말라/ 오직 생명의 손만이 너의 심장을 담아둘 수 있다// 함께 서 있으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 있지는 말라/ 사원의 기둥들이 서로 떨어져 있고/ 참나무와 삼나무는 서로의 그늘 속에서는 자라지 못하듯이"

후배 아들 정인석의 결혼 선물로 주기 위해 장천 김성태에 의뢰하여 제작한 작품 _ 20240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