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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習_아테나이칼럼/천리마리더십

[낙동포럼] 이순신, 무씨를 뿌리게 하다

by 변리사 허성원 2023. 10. 14.

이순신, 무씨를 뿌리게 하다

 

이순신은 디테일에 있다. 장군이 남기신 난중일기의 그 세세함과 꾸준함에 항상 감탄하지만, 선조에게 올린 장계에서 사망자와 부상자를 노비의 이름까지도 빠짐없이 기재한 그 치밀한 배려도 놀랍다. 그의 위대함은 크고 높은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낮고 작은 것에 바탕하고 있음을 절감한다. 또 하나의 디테일을 보았다. 정유년 6월25일 일기에 "다시 명령하여 무씨를 뿌리게 했다"라고 썼다.

그 말을 한참 생각했다. 무씨는 흔한 야채인 무의 종자이니, 입추를 맞아 김장용 파종을 지시한 듯하다. 조정의 경제적 지원이 없는 상황이라 둔전에서 자급자족하여야 했을 테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런데 그걸 왜 장군께서 굳이 지시하고 기록하였을까? 그게 비교적 작은 일이기도 하지만, 당시 장군의 상황은 그런 일에까지 여유롭게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장군은 불과 넉 달 전 정유년 2월25일에 통제사직에서 해임되었다. 한성으로 압송되어 투옥되고, 선조는 국문하여 그를 죽이려 했다. 우의정 정탁 등 여러 대신들의 구명운동으로 사형을 면하고, 도원수 권율 밑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을 받아 4월1일 옥에서 풀려났다. 권율의 본진을 찾아 남하하던 중 아산 본가에 들렀을 때, 어머니의 죽음을 맞는다. 아들의 석방 소식을 듣고 순천에서 올라오다 배에서 4월11일 별세한 것이다. 그 이틀 후에야 어머니의 시신을 모시고 장례를 준비하지만, 금부도사의 재촉에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떠나야 했다. 그날 이렇게 통곡했다. "4월19일. 일찍 길을 떠나며, 어머니 영 앞에 하직을 고하고 울며 부르짖었다. 어찌하랴, 어찌하랴. 천지간에 나와 같은 사정이 또 어디 있으랴."

그렇게 한 달 보름 간 걸어 합천 초계에 도착하여 백의종군을 시작했다. 그 가혹한 형편을 생각해보라. 범인으로서는 가히 그 슬픔과 아픔의 무게를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남해를 호령하던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되어 죄인의 신분으로 바퀴달린 감옥인 함거에 갇혀 천릿길을 압송되었고, 투옥과 국문을 당하며 죽음의 칼날 위에 서 있다가 풀려났는데, 이제 모친상을 당했다. 장례조차 치르지 못한 찢어진 가슴을 안고 천오백리길 걸었다. 몸과 마음이 어찌 온전할 것인가. 그런 그가 무씨를 뿌리라고 명령하였다.

무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하늘이 무너지고 몸이 갈라지는 아픔과 슬픔을 안고도 그 파종을 챙기는가. 무는 근기가 없는 야채이니 주식은 되지 못한다. 그러나 짠지나 말랭이로 갈무리해두면 전쟁터와 같은 각박한 상황에서 귀한 찬거리가 된다. 그마저 없으면 어떤 주식이 있어도 제 맛을 느끼며 배를 채우기 힘들 것이다. 백성들에겐 먹을거리가 생명이며 하늘이다. 그들을 먹이는 것은 리더의 애정이며 의무다. 그들이 있어야 조선수군도 있다. 장군에게 무는 곧 백성들의 생명이고 역시 나라의 희망이며 미래였던 것이다.

정부의 내년도 연구개발 예산이 대폭 삭감된다고 한다. 그 바람에 국책연구기관 등 과학 기술계는 걱정이 태산이다. 물적 자원이 빈약한 우리나라가 세계 경제 전쟁에서 당차게 나름의 위치를 지키는 것은, 그나마 수십 년간 국가가 연구개발에 아낌없이 투자를 지속하여 왔고, 그에 따라 양성된 우수한 연구개발 인력들이 누적하고 창출한 기술 경쟁력 덕분이다. 특허만 보더라도 세계에서의 양적 지위는 4위에 당당히 올라있다. 이런 역량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는 없지만, 하루아침에 무너뜨릴 수는 있다. 예산 삭감은 유능한 인재들부터 엑서더스를 촉발할 것이며, 일단 벗어난 이들의 발길을 돌리기는 터진 둑을 막기보다 힘든 일이다.

연구개발이란 가파른 길을 오르는 것과 같다. 가속 페달을 꾸준히 밟지 않고 잠시 제동을 걸면 다시 오를 힘을 제대로 내지 못하거나 미끄러져 내려오게 된다. 이순신 장군께서 그 처절한 상황에서도 무씨 파종을 챙긴 그 뜻을 헤아려보시라.

(*2023년 10월 18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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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중일기 중에서
4/1 맑음. 옥문 밖으로 나왔다. 남문 밖 윤간의 종 집에 이르러 봉, 분, 울, 사행, 원경 등과 한 방에 같이 앉아서 오래도록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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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맑음. 아침 익찍 남으로 길을 떠났다. 금오랑(금부도사) 이사빈, 서리 이수영, 나장 한언향 등은 먼저 수원부에 이르렀다. 나는 인덕원에서 말을 먹이면서 조용히 누워서 편안히 쉬다가 저물 무렵 수원에 들어가 경기 관찰사 홍이상 밑에서 심부름하는, 이름도 모르는 군사의 집엣서 잤다. 신복룡이 우연히 왔다가 내 행색을 보고 술로 위로했다. 부사 유영건이 나와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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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1 맑음. 새벽에 꿈이 몹시 심란하여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덕(德)을 불러 대강 이야기하고 또 아들 울에게도 이야기했다. 마음이 매우 언짢아서 취한 듯 미친 듯 마음을 종잡을 수가 없으니 이게 무슨 징조일까. 병드신 어머님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병드신 어머님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종을 보내어 어머님의 안후(安候)를 알아 오도록 했다. 금부도사는 온양으로 돌아갔다.
4/12 맑음. 종 태문이 안흥량에서 와서 편지를 전하는데 "어머님의 근력은 아주 쇠약하시지만, 9일에 위 아래 여러 사람이 무사히 안흥에 닿았다"고 한다. 법성포에 이르러 자고 있을 때 닻이 끌려 떠내려가서 배에 머무른 지 6일 만에 서로 나뉘었다가 무사히 만났다고 한다. 아들 울을 먼저 바닷가로 보냈다.
4/13 맑음. 일찍 아침을 먹고 어머님을 마중하려고 바닷가로 가는 길에 홍 찰방 집에 잠깐 들러 이야기를 하는 동안 울이 종 애수를 들여보내 "아직 배 오는 소식이 없다"고 했다. 또 들으니, 황천상이 술병을 들고 흥백의 집에 왔다고 하므로 홍과 작별하고 흥백의 집에 이르렀더니, 조금 있다가 종 순화가 배에서 와서 어머님의 부고를 전한다. 뛰쳐나가 둥그러지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하다. 곧 해암으로 달려가니 배가 이미 와 있었다. 길에서 바라보는, 가슴이 미어지는 슬픔이야 이루 다 적으랴 ... 뒷날 대강 적었다.
4/14 맑음. 홍 찰방, 이 별좌 등이 들어와 곡하고 관을 짰는데, 관은 본영에서 준비해 가져온 것으로 조금도 흠난 데가 없다고 한다.
4/15 맑음. 늦게 입관했다. 친한 벗 오종수가 진심으로 호상(護喪)을 정성껏 해 주니, 뼈가 가루가 되어도 잊기 어렵다. 관에 대해서는 다른 유감은 없으니 이것만은 다행이다. 천안 수령이 들어와서 행상을 준비하고, 전경복이 연일 진심으로 상복 만드는 일을 돌봐주니 슬프고 감사한 마음을 어찌 말로 다하랴.
4/16 궃은비. 배를 끌어 중방포에 옮겨 대어 영구를 상여에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마을을 바라보며 찢어지는 아픔이야 어떻게 다 말하랴. 집에 이르러 빈소를 차렸다. 비가 억수같이 썯아지고 맥이 다 빠진 데다가 남쪽을 갈 길이 또한 급박하니 부르짖으며 울었다. 다만 어서 죽기를 기다릴 따름이다. 천안이 돌아갔다.
4/17 맑음. 금부도사의 서기 이수영이 공주에서 와 빨리 떠나기를 재촉했다.
4/18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몸이 몹시 불편해 머리를 내놓지 못하고 그저 빈소 앞에서 곡만 하다가 종 금수의 집으로 물러 나왔다. 늦게 계원들이 내가 있는 곳으로 모여 와서 일을 의논하고 헤어졌다.
4/19 맑음. 일찍 길을 떠나며, 어머니 영 앞에 하직을 고하고 울며 부르짖었다. 어찌하랴, 어찌하랴. 천지간에 나와 같은 사정이 또 어디 있으랴. 어서 죽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 뇌의 집에 이르러 선조의 사당에 하직을 아뢰고 그 길로 금곡 강선전의 집 앞이 이르러 강정, 강영수를 만나 말에서 내려 곡하고, 다시 그길로 보산원에 닿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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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4 이날은 입추다. 새벽안개가 사방에 자욱하여 골짜기를 분간하기 어려웠다. 아침에 수사 권언경의 종 세공과 감손이 와서 무 밭에 대한 일을 아뢰었다. 또, 생원 안극가가 방문해서 세상 사정을 이야기했다. 무 밭을 갈고 심는 일의 감관으로 이원룡, 이희남, 정상명, 문임수 등을 정해 보냈다. 오후에는 ..
6/25 맑음. 다시 명령하여 무씨를 뿌리게 했다. 아침 식사 전에 종사관 황여일이 방문해서 수전에 대한 일을 말했다. 또 원수가 오늘이나 내일 안에 진중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했다. 저녁에 종 경이 한산도에서 돌아왔는데, 보성 군수 안홍국(安弘國)이 탄환에 맞아 죽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너무 놀라서 슬픔을 이기지 못했다. 적은 한 놈도 잡지 못하고 먼저 두 장수를 잃어버리다니 통탄함을 어찌 말하랴. 거제가 사람을 시켜 미역을 실어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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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 모티브를 준 이순신포럼 이부경 대표의 글)

"1597년 6월 25일(甲申). 맑다. 무씨를 다시 뿌리도록 지시했다. 황 종사관이 와서 보고 군사 문제를 의논하였다. 원수가 금명간 진으로 돌아 올 것이라고 하였다. 저녁에 종 한경(漢京)이 한산도에서 돌아왔는데, 보성 군수 안홍국(安弘國)이 왜적의 총에 맞아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움과 슬픔을 이길 수 없었다. 적은 하나도 잡지 못하고 먼저 두 장수만 잃어 버렸으니 통탄스러움을 어찌 다 말하랴. 거제 현령(安衛)도 사람을 시켜 미역을 보내왔다. - 박기봉 편역 [충무공 이순신 전서] - 에서 발췌

전쟁 중이며 또 백의종군 하는 처지에 언제 어떻게 될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에서 무밭에 씨는 왜 뿌리는 것 입니까? 그리고 미역은 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명량대첩의 승리는 이렇게 희망을 잃지 않는 마음에서부터 백성(부하)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되었나 봅니다. 석 달 전만 하더라도 삼도수군통제사였으나 현실의 백의종군 중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멀리 내다보는 통찰력과 더불어 다음 전투을 준비하고 상관을 돕고 지원하는 이순신의 모습에서 리더의 참모습을 배웁니다.
맥아더장군도 “리더가 되려면 남에게 복종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셨고, “복종을 배움으로써 지휘하는 법을 알게 될 것이다.” 라는 이탈리어 격언도 있듯이 온갖 굴욕을 견디어 내시며 복종하시는 모습에서 무엇을 읽으시는지요. 성실한 마음으로 복종한다는 것, 희망을 잃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 한다는 것, 이것은 그 어느 누구도 아닌 자기자신 이외에는 아무도 실행에 옮길 사람이 없습니다. 도전하지 않으면 도전 받으니까요. 이순신포럼 이부경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