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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과 세상살이/설원(說苑)_유향(劉向)

지무(券十五 指武)_설원(說苑) _ 유향(劉向)

by 변리사 허성원 2022. 8. 6.

지무(券十五 指武)_설원(說苑) _ 유향(劉向)

 

** 역문은 동양고전DB에서 가져옴.

** 儒家戰爭觀과 이를 輯編劉向戰爭思想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전쟁을 좋아하면 반드시 멸망하고, 전쟁을 잊으면 반드시 위험해진다.’는 두 개의 명제를 근본으로 編述하였다. 전쟁에서의 승리와 패배의 결과를 부르는 중요한 要素例事를 통하여 보이고 있다.
예를 들면, ‘국토가 넓고 인구가 많으며, 견고한 갑옷과 날카로운 무기가 있고, 용맹한 장수가 있어도 군사들이 친근히 따르지 않으면 승리할 수 없다. 內治를 잘하지 못하면 國外의 일을 바르게 할 수 없고 근본적인 은혜가 미치지 않으면 지엽적인 일을 할 수 없다. 전투를 할 때는 자신의 몸과 집 등의 일체를 잊고 전투에 매진하면서 죽음을 집에 돌아가는 것처럼 여겨야 한다.’는 등의 기본을 말하고 있다.
한편 孔子가 전쟁에 반대했던 사례를 들었으며, 무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경우로 仁道를 행하지 않아 백성이 고통을 당하는 나라에는 당연히 무력을 사용해야 한다는 뜻을 보이고 있다.

 

1. 國雖大,好戰必亡;天下雖安,忘戰必危。
上不玩兵,下不廢武

司馬法曰:「國雖大,好戰必亡;天下雖安,忘戰必危。」易曰:「君子以除戎器,戒不虞。」夫兵不可玩,玩則無威;兵不可廢,廢則召寇。昔吳王夫差好戰而亡,徐偃王無武亦滅。故明王之制國也,上不玩兵,下不廢武。易曰:「存不忘亡,是以身安而國家可保也。」

司馬法에는 “나라가 强大하여도 전쟁을 좋아하면 반드시 멸망하고, 천하가 편안하여도 軍備를 잊으면 반드시 위험해진다.” 하였고, 周易에는 君子가 이것을 보고 兵器를 수리하여 뜻밖의 변란에 대비한다.” 하였다. 전쟁은 경솔히 일으키면 안 되니, 전쟁을 경솔히 일으키면 威力이 없고, 군비를 폐기하면 안 되니, 군비를 폐기하면 적의 침입을 부르게 된다.

옛날 吳王 夫差는 전쟁을 좋아하다가 멸망하였고, 나라 偃王은 군비가 없어서 똑같이 멸망하였다. 그러므로 현명한 임금이 나라를 다스릴 적에 윗사람은 경솔히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 아랫사람은 군비를 폐기하지 않게 하였다.

周易보존해도 멸망의 위험을 잊지 않는다. 이 때문에 몸이 편안하여 국가를 보존할 수 있다.” 하였다.

2. 「夫楚劍利、倡優拙。夫劍利則士多慓悍,倡優拙則思慮遠也,吾恐楚之謀秦也。

秦昭王中朝而歎曰:「夫楚劍利、倡優拙。夫劍利則士多慓悍,倡優拙則思慮遠也,吾恐楚之謀秦也。」此謂當吉念凶,而存不忘亡也,卒以成霸焉。

秦 昭王이 조회하는 중에 탄식하며 말했다. 楚나라는 劍이 날카롭고 광대는 연기가 서툴다. 劍이 날카로우면 군사들이 대부분 날쌔고 용맹하며, 광대의 연기가 서툴면 君主의 생각이 원대하니, 나는 楚나라가 우리 秦나라를 도모할까 두렵다.”

이 말은 응당 할 때 함이 올 것을 생각하고 보존할 때 멸망이 닥칠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니, 나라가마침내 霸業을 이루게 된 것이다.

(* 倡優拙則思慮遠也. 광대가 서툴면 (군주의) 생각은 먼 곳에 있다. 군주가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있으면, 안락과 즐김을 멀리하고 절제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3. 吾賴於文德而不明武備,好行仁義之道而不知詐人之心,以至於此

王孫厲謂楚文王曰:「徐偃王好行仁義之道,漢東諸侯三十二國盡服矣!王若不伐,楚必事徐。」王曰:「若信有道,不可伐也。」對曰:「大之伐小,強之伐弱,猶大魚之吞小魚也,若虎之食豚也,惡有其不得理?」文王興師伐徐,殘之。徐偃王將死,曰:「吾賴於文德而不明武備,好行仁義之道而不知詐人之心,以至於此。」夫古之王者其有備乎?

王孫厲楚 文王에게 말했다. “徐 偃王仁義를 행하기 좋아하여 漢水 동쪽의 32개 제후국이 모두 복종하고 있습니다. 왕께서 토벌하지 않으시면 나라는 반드시 나라를 섬기게 될 것입니다.” 文王이 말했다. “만일 진실로 仁義가 있다면 토벌할 수가 없다.”

王孫厲가 대답했다.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토벌하는 것과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토벌하는 것은 마치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삼키는 것과 같고 호랑이가 돼지를 잡아먹는 것과 같습니다. 어찌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 있겠습니까?” 이에 文王이 군대를 일으켜 나라를 토벌하여 멸망시켰다.

徐 偃王이 임종할 때 말했다. 나는 文德만을 믿어 武備에 밝지 못하고, 仁義의 道를 행하는 일만 좋아하여 간사한 사람의 마음을 모르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 그러니 고대의 君王은 武備가 있었던 것이다.”

4. 且吾聞兵者凶器也,爭者逆德也。今子陰謀逆德,好用凶器,殆人所棄,逆之至也,淫泆之事也,行者不利

吳起為苑守,行縣適息,問屈宜臼曰:「王不知起不肖,以為苑守,先生將何以教之?」屈公不對。居一年,王以為令尹,行縣適息。問屈宜臼曰:「起問先生,先生不教。今王不知起不肖,以為令尹,先生試觀起為之也!」屈公曰:「子將奈何?」吳起曰:「將均楚國之爵而平其祿,損其有餘而繼其不足,厲甲兵以時爭於天下。」屈公曰:「吾聞昔善治國家者不變故,不易常。今子將均楚國之爵而平其祿,損其有餘而繼其不足,是變其故而易其常也。且吾聞兵者凶器也,爭者逆德也。今子陰謀逆德,好用凶器,殆人所棄,逆之至也,淫泆之事也,行者不利。且子用魯兵不宜得志於齊而得志焉;子用魏兵不宜得志於秦而得志焉。吾聞之曰:『非禍人不能成禍。』吾固怪吾主之數逆天道,至今無禍。嘻!且待夫子也。」吳起惕然曰:「尚可更乎?」屈公曰:「不可。」吳起曰:「起之為人謀。」屈公曰:「成刑之徒不可更已!子不如敦處而篤行之,楚國無貴于舉賢。」

吳起太守가 되어 예속된 을 순행하다가 息縣에 당도하여 屈宜臼에게 물었다. “께서 내가 不肖한 줄을 모르시고 의 태수로 삼으셨으니, 선생은 저에게 무엇을 가르쳐주시렵니까?” 屈公은 대답하지 않았다.

1년이 지난 뒤에 왕이 오기를 令尹으로 삼으니, 오기가 현을 순행하다가 식현에 당도하여 굴의구에게 물었다. “전에 내가 선생께 물었으나 선생은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지금 왕께서 내가 不肖한 줄을 모르시고 영윤으로 삼으셨으니, 선생은 시험 삼아 내가 하는 일을 두고 보시오.”

굴공이 말했다. “그대는 장차 어떻게 하시렵니까?” 오기가 말했다. “앞으로 나라의 벼슬을 균등하게 하여 녹봉을 공평하게 하고, 넉넉한 사람의 재물을 덜어서 부족한 사람을 보태주며, 군대를 훈련시켜 때가 되면 천하를 다툴 것이오.”

굴공이 말했다. “나는 들으니, 옛날 나라를 잘 다스린 사람은 옛 制度를 변경하지 않으며, 常規를 바꾸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대는 앞으로 나라의 벼슬을 균등하게 하여 녹봉을 공평하게 하고, 넉넉한 사람의 재물을 덜어서 부족한 사람을 보태주려고 하니, 이는 옛 제도를 변경하고 상규를 바꾸는 것입니다.

또 나는 들으니 武力은 凶器이고, 전쟁은 逆德이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대는 은밀히 역덕을 꾀하며 흉기를 쓰기 좋아하니, 아마 백성들이 싫어할 것이오. 이는 역덕의 지극함이고 절제 없이 방종한 행위이니, 이를 시행하는 사람은 이롭지 못합니다. 또 그대가 나라 군대를 지휘하여 전쟁할 때 나라에 승리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데 승리하였고, 그대가 나라 군대를 지휘하여 전쟁할 때 나라에 승리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데 승리하였습니다.

나는 들으니, ‘患亂을 일으키는 사람이 아니면 환란을 만들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본래 우리 임금께서 여러 차례 天道을 어겼는데도 지금까지 환란을 당하지 않은 것을 괴이하게 여겼습니다. , 우선 그대가 하는 일을 두고 보겠습니다.” 오기가 두려워하며 말했다. “지금이라도 고칠 수 있겠습니까?” 굴공이 말했다. “안 됩니다.” 오기가 말했다. “내가 그 사람을 위하여 도모해보겠습니다.” 굴공이 말했다. “형체가 완성된 사람은 고칠 수가 없으니, 그대가 敦厚하게 처신하고 篤實하게 일을 하는 것보다 나은 일이 없습니다. 초나라에는 어진 이를 추천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없습니다.”

5. 「文王不能使不附之民;先軫不能戰不教之卒;造父王良不能以弊車不作之馬,趨疾而致遠;羿逄蒙不能以枉矢弱弓,射遠中微

春秋記國家存亡,以察來世,雖有廣土眾民,堅甲利兵,威猛之將,士卒不親附,不可以戰勝取功。晉侯獲於韓;楚子玉得臣敗於城濮;蔡不待敵而眾潰。故語曰:「文王不能使不附之民;先軫不能戰不教之卒;造父王良不能以弊車不作之馬,趨疾而致遠;羿逄蒙不能以枉矢弱弓,射遠中微;故強弱成敗之要,在乎附士卒,教習之而已。」

春秋에 국가의 存亡을 기록하여 후세 사람들이 살펴보는 거울이 되게 하였다. 넓은 국토와 많은 백성, 견고한 갑옷과 날카로운 무기, 용맹한 장수가 있더라도 士卒들이 친근히 따르지 않으면 전쟁에 승리하여 戰功을 세울 수 없다晉侯에서 사로잡혔고, 나라의 子玉 得臣城濮에서 패배하였으며, 나라는 적군의 공격을 기다리지도 않고 군사들이 흩어져 달아났다.

그러므로 옛말에 ‘周 文王도 친근히 따르지 않는 백성은 부릴 수가 없고, 先軫도 훈련시키지 않은 군사로는 전쟁하지 못하며, 造父와 王良도 망가진 수레와 일어나지 못하는 말로는 빨리 달려 먼 곳까지 이르지 못하고, 羿와 逢蒙도 굽은 화살과 약한 활로는 먼 곳의 작은 표적을 맞히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 때문에 强弱成敗의 요체는 사졸들이 친밀히 따르게 하고 그들을 가르쳐 훈련시키는 데 달려 있을 뿐이다.

6. 故內治未得不可以正外,本惠未襲,不可以制末。

內治未得,不可以正外,本惠未襲,不可以制末,是以春秋先京師而後諸夏,先諸華而後夷狄。及周惠王,以遭亂世,繼先王之體,而強楚稱王,諸侯背叛,欲申先王之命,一統天下。不先廣養京師,以及諸夏,諸夏以及夷狄,內治未得,忿則不料力,權得失,興兵而征強楚,師大敗,撙辱不行,大為天下笑。幸逢齊桓公以得安尊,故內治未得不可以正外,本惠未襲,不可以制末。

國內政治를 잘 다스리지 못하면 國外의 일을 바로잡을 수 없고, 根本적인 은혜가 두루 미치지 않으면 枝葉적인 일을 할 수 없다. 이 때문에 春秋京師先順位로 하고 諸夏後順位로 하였으며, 諸華를 선순위로 하고 夷狄을 후순위로 하였다.

周 惠王 때에 이르러 혼란한 시대를 만나 先王의 계통을 이었으나 강대한 나라는 을 칭하고 제후들은 왕실을 배반하였다. 선왕의 을 펴서 천하를 하나로 통합하려고 하였으나 먼저 京師의 역량을 널리 배양하여 점차 확대하여 諸夏에 미치게 하고 제하에서 점차 확대하여 夷狄에 미치게 하지 못하였다.

국내의 정치가 잘 다스려지지 않았는데 분노하면 힘을 헤아리지도 않고 得失을 고려하지도 않은 채 군대를 일으켜 강대한 초나라를 정벌하였다가 군대가 크게 패하여 굴욕을 당하고 선왕의 명을 실행하지 못하여 천하 사람들의 큰 비웃음을 샀다. 다행히 齊 桓公을 만나 왕실의 안정과 제후의 존경을 받게 되었다. 그러므로 국내의 정치를 잘 다스리지 못하면 국외의 일을 바로잡을 수 없고, 근본적인 은혜가 두루 미치지 않으면 지엽적인 일을 할 수 없는 것이다.

7. 必死不如樂死,樂死不如甘死,甘死不如義死,義死不如視死如歸

<必死는 樂死만 못하고,樂死는 甘死만 못하고,甘死는 義死,義死는 視死如만 못하다.>

將帥受命者,將帥入,軍吏畢入,皆北面再拜稽首受命。天子南面而授之鉞,東行,西面而揖之,示弗御也。故受命而出忘其國,即戎忘其家,聞枹鼓之聲,唯恐不勝忘其身,故必死。必死不如樂死,樂死不如甘死,甘死不如義死,義死不如視死如歸,此之謂也。故一人必死,十人弗能待也;十人必死,百人弗能待也;百人必死,千人不能待也;千人必死,萬人弗能待也;萬人必死,橫行乎天下,令行禁止,王者之師也。

군대를 거느리고 王命을 받아 出征할 때 장군이 솔선하여 朝廷에 들어가면 軍吏들이 전부 들어가서 모두 북쪽을 향하여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린 뒤 명령을 받는다. 天子가 남쪽을 향하고서 장군에게 斧鉞을 주고 동쪽으로 가서 서쪽을 향하고서 을 하는 것은 장군의 軍權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뜻을 보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왕명을 받고 출정했을 때에는 나라의 통제를 잊고, 전쟁을 할 때에는 집안일을 잊으며, 진격의 북소리를 들었을 때에는 승리하지 못할까 걱정하여 자신의 몸을 잊기 때문에 必死的으로 싸우는 것이다.

그렇지만 必死는 즐거운 마음으로 죽는 것[樂死]만 못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죽는 것은 기꺼이 죽는 것[甘死]만 못하고, 기꺼이 죽는 것은 正義를 위해 죽는 것[義死]만 못하고, 정의를 위해 죽는 것은 죽음을 집에 돌아가는 것처럼 여기는 것만 못하니, 이를 두고 한 말이다. 그 때문에 한 사람이 필사적으로 싸우면 열 사람이 당해내지 못하고, 열 사람이 필사적으로 싸우면 백 사람이 당해내지 못하며, 백 사람이 필사적으로 싸우면 천 사람이 당해내지 못하고, 천 사람이 필사적으로 싸우면 만 사람이 당해내지 못하며, 만 사람이 필사적으로 싸우면 천하를 마음대로 횡행하여 명령하면 바로 시행되고 금지하면 즉시 그치게 되니, 이것이 帝王의 군대이다.

8. 故將軍者,士之心也,士者將之枝體也,心猶與則枝體不用,田將軍之謂乎!

田單為齊上將軍,興師十萬,將以攻翟,往見魯仲連子。仲連子曰:「將軍之攻翟,必不能下矣!」田將軍曰:「單以五里之城,十里之郭,復齊之國,何為攻翟不能下?」去上車不與言。決攻翟,三月而不能下,齊嬰兒謠之曰:「大冠如箕,長劍拄頤,攻翟不能下,壘於梧丘。」於是田將軍恐駭,往見仲連子曰:「先生何以知單之攻翟不能下也?」仲連子曰:「夫將軍在即墨之時,坐則織蕢,立則杖臿為士卒倡曰:『宗廟亡矣,魂魄喪矣,歸何黨矣。』故將有死之心,士卒無生之氣。今將軍東有掖邑之封,西有淄上之寶,金銀黃帶,馳騁乎淄澠之間,是以樂生而惡死也。」田將軍明日結髮,徑立矢石之所,乃引枹而鼓之,翟人下之。故將軍者,士之心也,士者將之枝體也,心猶與則枝體不用,田將軍之謂乎!

田單나라의 上將軍이 되어 10만의 병력을 일으켜 을 공격하려고 할 때, 魯仲連子를 찾아가 뵈었다仲連子가 말했다. “장군은 을 공격해도 반드시 이기지 못할 것이오.” 田將軍이 말했다. “제가 일찍이 5리밖에 안 되는 10리쯤 되는 을 가지고 제나라를 수복하였는데, 어찌 을 공격하여 이기지 못한단 말이오.”그러고는 떠나면서 수레에 올라 다시 말도 하지 않고 가버렸다전단이 결심하고 을 공격했으나 석 달 동안 이기지 못하니, 제나라의 어린아이들이 노래를 불렀다. “[]처럼 큰 을 쓰고 긴 으로 턱만 괴고 있네. 을 공격하나 이기지 못하여 梧丘에 군사의 시체만 쌓이네.”

이에 전장군은 두렵고 놀라 중련자를 찾아가 뵙고 말했다. “선생은 어떻게 제가 을 공격해도 이기지 못할 줄을 아셨습니까?” 중련자가 설명해주었다.

장군이 卽墨에서 싸울 때에는 앉으면 삼태기를 짜고 서면 삽을 잡고서 士卒들에게 솔선하여 宗廟가 망하고 조상의 魂魄을 잃었으니, 어디로 돌아가랴.’라고 독려하였소그 때문에 장수들은 목숨을 바치려는 각오가 있었고 사졸들은 구차히 살려는 태도가 없었소. 그랬는데 지금 장군은 동쪽에는 掖邑封地가 있고, 서쪽에는 淄水 가의 보물이 있으며, 黃金으로 장식한 띠를 두르고 淄水澠水 사이를 마음대로 달리고 있소. 이 때문에 사는 것을 즐거워하고 죽는 것을 싫어하고 있소.”

그러자 전장군은 이튿날 머리를 묶고 화살과 돌이 날아오는 곳에 똑바로 서서 곧장 북채를 잡고 북을 치며 공격하니, 翟人이 항복하였다. 그러므로 장군은 사졸의 마음이고 사졸은 四肢와 같은 격이다. 마음이 머뭇거리면 사지가 말을 듣지 않으니, 전장군을 두고 이르는 말일 것이다.

9. 吾聞田恒新得國而愛其民,內同其財,外同其勤勞,治軍若此,其得眾也,不可待也。

晉智伯伐鄭,齊田恒救之,有登蓋必身立焉,車徒有不進者必令助之。壘合而後敢處,井灶成而後敢食。智伯曰:「吾聞田恒新得國而愛其民,內同其財,外同其勤勞,治軍若此,其得眾也,不可待也。」乃去之耳。

나라 智伯나라를 토벌하니, 나라 田恒이 구원하였다. 전항은비옷을 입고 꼭 친히 서서 兵車步兵이 전진하지 못하면 반드시 돕게 하였으며, 堡壘가 완공된 뒤에야 감히 거처하고 우물과 부엌이 완성된 뒤에야 감히 밥을 먹었다.

지백이 말했다. “내가 듣건대, 전항이 이제 막 國政을 장악하고 백성을 사랑하여, 안으로는 백성들과 재물을 같이 나누어 쓰고 밖으로는 병사들과 노고를 함께한다고 한다. 군대를 이와 같이 다스리면 民衆의 마음을 얻을 것이니, 대적할 수가 없다.그러고는 이내 철수하여 떠났다.

10. 壘陳之次,車騎之處,勒兵之勢,軍之法令,賞罰之數。使士赴火蹈刃,陷陣取將,死不旋踵者

太公兵法曰:「致慈愛之心,立武威之戰,以畢其眾;練其精銳,砥礪其節,以高其氣。分為五選,異其旗章,勿使冒亂;堅其行陣,連其什伍,以禁淫非。」壘陳之次,車騎之處,勒兵之勢,軍之法令,賞罰之數。使士赴火蹈刃,陷陣取將,死不旋踵者,多異於今之將也。

太公兵法에 말했다. “將帥는 자애로운 마음을 다하고 武力의 위세로 싸울 의지를 세워 모든 군대를 지휘하며, 정예군을 훈련시키고 志節을 갈고 닦아서 사기를 高揚시키며, 군대를 나누어 다섯 줄로 만들고 旗幟를 다르게 하여 서로 혼란하게 하지 말며, 隊伍行陣을 견고하게 하고 連坐시켜 잘못이 발생하는 것을 방지해야 된다.”

太公兵法陣營의 순서와 車騎의 안배와 군대를 지휘하는 권세와 군대의 법령과 賞罰의 등급으로 병사를 불속에 뛰어들게 하고 칼날을 밟으면서 적진을 함락시키고 장수를 잡게 하여도 죽었으면 죽었지 발길을 돌리지 않게 한 것은 지금의 장수와 많이 다르다.

11. 國容不入軍,軍容不入國也

나라의 制度 儀節은 군대에 적용하지 않고, 군대의 제도와 의절은 나라에 적용하지 않는다.

孝昭皇帝時,北軍監御史為姦,穿北門垣以為賈區。胡建守北軍尉,貧無車馬,常步,與走卒起居,所以慰愛走卒甚厚。建欲誅監御史,乃約其走卒曰:「我欲與公有所誅,吾言取之則取之;斬之則斬之。」於是當選士馬日,護軍諸校列坐堂皇上,監御史亦坐。建從走卒趨至堂下拜謁,因上堂,走卒皆上,建跪指監御史曰:「取彼。」走卒前拽下堂。建曰:「斬之。」遂斬監御史,護軍及諸校皆愕驚,不知所以。建亦已有成奏在其懷。遂上奏以聞,曰:「臣聞軍法立武以威眾,誅惡以禁邪。今北軍監御史公穿軍垣以求賈利,買賣以與士市,不立剛武之心,勇猛之意,以率先士大夫,尤失理不公。臣聞黃帝理法曰:『壘壁已具,行不由路,謂之姦人,姦人者殺。』臣謹以斬之,昧死以聞。」制曰:「司馬法曰:『國容不入軍,軍容不入國也。』建有何疑焉?」建由是名興,後至渭城令,死。至今渭城有其祠也。

孝昭皇帝 때에 北軍 監御史가 법에 어긋난 행위를 하여 北門의 담장을 뚫어서 물건을 매매하는 장소로 만들었다. 胡建北軍尉로 근무하면서 가난하여 車馬가 없어 항상 걸어다니며 사졸들과 생활하였다. 이 때문에 사졸들을 위로하고 사랑함이 매우 두터웠다호건이 감어사를 誅殺하려고 마침내 사졸들과 약속하여 말했다. “나는 그대들과 주살할 사람이 있으니, 내가 잡으라고 하면 잡고, 내가 斬首하라고 하면 참수하라.”

이에 兵馬(군대)를 선발하는 날에 護軍과 여러 校尉들이 위에 벌여 앉았고 감어사도 앉아 있었다. 호건이 사졸들을 따라 빠른 걸음으로 당 아래에 이르러 拜謁하고 이어 당에 오르니 사졸들도 모두 올라왔다호건이 무릎을 꿇고 감어사를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저자를 잡아라.” 하니, 사졸들이 앞으로 나와 그를 끌고 당 아래로 내려갔다호건이 말하기를 참수하라.” 하니, 마침내 감어사를 참수하였다. 호군과 여러 교위들이 모두 놀라 어쩔 줄을 몰랐다.

호건은 또한 이미 작성한 上奏文을 품속에 지니고 있다가 마침내 상주문을 올려 보고하였다. “신은 들으니, 軍法武威를 세워 군대에 위엄을 보이고 악한 사람을 주살하여 사악한 행위를 금지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북군 감어사는 개인적인 이익을 취하기 위해 공공연히 군영의 담을 뚫어 사사로이 군사들과 물건을 거래하여, 강한 武勇의 정신과 용감한 의지를 세워서 士大夫들이 솔선하지 않으니, 더욱 불합리하고 불공정합니다신은 들으니, 黃帝理法군영의 城壁이 이미 완비되었는데 규정된 길을 따라 다니지 않으면 이런 이를 사악한 사람이라고 이르니, 사악한 사람은 죽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삼가 이런 사람을 斬首하고 죽음을 무릅쓰고 보고합니다.”

황제가 批答을 내렸다. “司馬法‘나라의 制度와 儀節은 군대에 적용하지 않고, 군대의 제도와 의절은 나라에 적용하지 않는다.’라 하였는데, 호건은 무엇을 의심하는가!”호건이 이 일 때문에 이름을 떨쳐서 뒤에 渭城令에 이르러 임소에서 죽었는데, 지금까지 위성에 그의 사당이 있다.

12. 此善當敵者也。未及夫折衝於未形之前者,揖讓乎廟堂之上而施惠乎百萬之民

魯石公劍,迫則能應,感則能動,●穆無窮,變無形像,復柔委從,如影與響,如尨之守戶,如輪之逐馬,響之應聲,影之像形也,閶不及鞈,呼不及吸,足舉不及集。相離若蟬翼,尚在肱北眉睫之微,曾不可以大息小,以小況大。用兵之道,其猶然乎?此善當敵者也。未及夫折衝於未形之前者,揖讓乎廟堂之上而施惠乎百萬之民,故居則無變動,戰則不血刃,其湯武之兵與!

魯石公을 들고 춤출 때 바싹 다가가면 感應하고 감응하면 움직인다. 끝없이 깊고 玄妙하여 변화해도 형상이 없고 차분하게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 그림자나 메아리 같고 삽살개가 집을 지키는 것 같고 수레바퀴가 말을 따라가는 것 같아서 메아리가 소리에 호응하고 그림자가 형체를 닮은 것과 같다.

의 북소리는 의 북소리에 미치지 못하고, 내뱉는 숨은 들이마시는 숨에 미치지 못하고, 발을 드는 것은 발을 모으는 것에 미치지 못한다. 그 차이는 매미 날개처럼 작지만 오히려 팔꿈치와 등, 눈썹과 속눈썹처럼 미세한 사이에 있는 것과 같아서 큰 것으로 작은 것을 제지하지 못하고 작은 것으로 큰 것을 겨누지 못한다. 군사를 부리는[用兵] 방법도 이와 같을 것이다.

이것이 적을 잘 대적하는 방법이다. 다만 전쟁이 벌어지기 전에 적을 제압하여 물러가게 하고, 敵國 사람과 조정에서 禮義를 행하며 담판하여 전쟁을 막아 만백성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러므로 평상시에는 변란이 발생하지 않게 하고 전쟁을 할 때에는 칼날에 피를 묻히지 않게 하는 것, 이것이 湯王武王이 군사를 부리는 방법일 것이다.

13. 回願得明王聖主而相之,使城郭不脩,溝池不越,鍛劍戟以為農器,使天下千歲無戰鬥之患

孔子北遊,東上農山,子路、子貢、顏淵從焉。孔子喟然歎曰:「登高望下,使人心悲,二三子者,各言爾志。丘將聽之。」子路曰:「願得白羽若月,赤羽若日,鐘鼓之音上聞乎天,旌旗翩翻,下蟠於地。由且舉兵而擊之,必也攘地千里,獨由能耳。使夫二子為從焉!」孔子曰:「勇哉士乎!憤憤者乎﹗」子貢曰:「賜也,願齊楚合戰於莽洋之野,兩壘相當,旌旗相望,塵埃相接,接戰搆兵,賜願著縞衣白冠,陳說白刃之間,解兩國之患,獨賜能耳。使夫二子者為我從焉!」孔子曰:「辯哉士乎!僊僊者乎!」顏淵獨不言。孔子曰:「回!來!若獨何不願乎?」顏淵曰:「文武之事,二子已言之,回何敢與焉!」孔子曰:「若鄙,心不與焉,第言之!」顏淵曰:「回聞鮑魚蘭芷不同篋而藏,堯舜桀紂不同國而治,二子之言與回言異。回願得明王聖主而相之,使城郭不脩,溝池不越,鍛劍戟以為農器,使天下千歲無戰鬥之患,如此則由何憤憤而擊,賜又何僊僊而使乎?」孔子曰:「美哉,德乎!姚姚者乎!」子路舉手問曰:「願聞夫子之意。」孔子曰:「吾所願者,顏氏之計,吾願負衣冠而從顏氏子也。」

孔子께서 북쪽 지방을 유람하다가 동쪽에 있는 農山에 오르셨는데, 子路子貢顔淵이 모시고 따랐다공자께서 한숨을 쉬고 탄식하며 말씀하셨다. “높은 곳에 올라 아래를 바라보니 사람의 마음을 서글프게 하는구나. 너희 몇 사람은 각각 자기가 품은 뜻을 말해보거라. 내가 들어보리라.”

자로가 말했다. “달빛 같은 흰 깃털과 해 같은 붉은 깃털로 된 指揮旗를 얻어서 종과 북소리가 위로 하늘에까지 진동하고 깃발이 펄럭거려 아래로 땅에 닿아 맴돌면 저는 군대를 거느리고 공격하여 반드시 천 리의 땅을 빼앗을 것입니다. 이는 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니, 저 두 사람이 저를 따르게 하기를 원합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용감하구나. 士人이여! 憤憤하여 평온하지 못한 사람이구나.”

자공이 말했다. “저는 나라와 나라가 넓고 큰 들판에서 交戰하여 양쪽의 堡壘가 서로 대치하고, 깃발을 서로 바라보며 티끌이 서로 이어져 接戰해 싸우면 저는 흰 옷에 흰 을 쓰고 흰 칼날이 부딪치는 사이에서 利害를 말하여 두 나라의 兵禍를 해결하기를 원합니다. 이는 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니, 저 두 사람이 저를 따르게 하기를 원합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말재주가 있구나. 사인이여! 말을 조리 있게 잘하는 사람이구나.”

顔淵만 말을 하지 않으니,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顔回, 이리 오너라. 너만 어찌 홀로 원하는 것이 없느냐?” 안연이 말했다. “文臣武臣의 일은 두 사람이 이미 말했으니, 제가 어찌 끼어들겠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두 사람이 말한 일을 비루하게 여겨 끼어들지 않으려고 하나, 일단 말해보거라.”

안연이 말했다. “저는 들으니, 鮑魚와 蘭芷는 같은 바구니에 넣어 간수하지 못하고, 堯舜과 桀紂는 같은 나라에서 다스리지 못한다 하였습니다. 두 사람의 말은 제가 원하는 말과 다릅니다. 저는 明王‧聖主를 만나 그를 보좌하여 城郭을 修築하지 않고 해자를 파지 않게 하며, 劍과 창 같은 무기를 녹여서 농기구를 만들어 천 년 동안 천하에 전쟁의 근심이 없게 하기를 원합니다. 이와 같으면 자로는 어찌 분분히 出擊할 것이며, 자공은 또 어찌 말재주로 사신을 나가겠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아름답다. 너의 이여! 아름답고 성대한 사람이구나.” 자로가 손을 들어 물었다. “선생님의 뜻은 어떤지 듣기를 바랍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원하는 것은 바로 안회의 생각이니, 나는 衣冠을 짊어지고 顔氏의 아들을 따르려고 한다.”

14. 若朝廷有禮,上下有親,民之眾皆君之畜也,君將誰攻?若朝廷無禮,上下無親,民眾皆君之讎也,君將誰與守?

魯哀公問於仲尼曰:「吾欲小則守,大則攻,其道若何?」仲尼曰:「若朝廷有禮,上下有親,民之眾皆君之畜也,君將誰攻?若朝廷無禮,上下無親,民眾皆君之讎也,君將誰與守?」於是廢澤梁之禁,弛關市之征,以為民惠也。」

魯 哀公仲尼에게 물었다. “나는 나라의 힘이 弱小할 때는 지키고, 나라의 힘이 强大할 때는 외국을 공격하려고 하는데, 그 방법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중니께서 대답하셨다. “만일 조정에 禮法이 있고 윗사람과 아랫사람 사이에 친애함이 있으면 수많은 백성이 모두 임금께서 기르는 사람이니, 임금께서는 누구를 공격하겠습니까. 만일 조정에 예법이 없고 윗사람과 아랫사람 사이에 친애함이 없으면 수많은 백성이 모두 임금의 원수이니, 임금께서는 누구와 나라를 지키겠습니까.

이에 애공이 澤梁의 금령을 해제하고 關市의 세금 징수를 줄여서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15. 伐枉不伐順;伐險不伐易;伐過不伐不及

<굽으면 치고 바르면 치지 않고, 지세가 험하면 치고 순하면 치지 않고, 넘치면 치고 모자라면 치지 않는다.>

文王曰:「吾欲用兵,誰可伐?密須氏疑於我,可先往伐。」管叔曰:「不可。其君天下之明君也,伐之不義。」太公望曰:「臣聞之先王伐枉不伐順;伐險不伐易;伐過不伐不及。」文王曰:「善。」遂伐密須氏,滅之也。

文王이 말했다. “武力을 쓰려고 하는데, 어느 나라를 토벌하면 좋을까?” 太公望이 말했다. “密須氏가 우리에게 다른 마음을 품고 있으니, 먼저 가서 토벌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管叔이 말했다. “안 됩니다. 그 나라의 군주는 천하의 明君이니, 그를 토벌하는 것은 의롭지 못한 일입니다.”

태공망이 말했다. “신은 들으니, 先王은 바르지 못한 나라는 토벌하고 순종하는 나라는 토벌하지 않으며, 地勢가 험준한 나라는 토벌하고 쉽게 진격할 수 있는 나라는 토벌하지 않으며, 분수에 넘치는 나라는 토벌하고 분수에 넘치지 않는 나라는 토벌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문왕이 좋은 말이오.” 하고 마침내 밀수씨를 토벌하여 멸망시켰다.

(* '굽으면 치고 바르면 치지 않고, 지세가 험하면 치고 순하면 치지 않고, 넘치면 치고 모자라면 치지 않는다.' 마케팅에서 공략 대상을 결정할 때 좋은 판단기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윤리의식이 낮은 경쟁사, 공략이 어려운 선발 기업, 시장 지배력의 확장이 과도한 시장..)

16. 吾欲不戰而知勝,不卜而知吉,使非其人
王攻其失民者也,何攻天子乎?

武王將伐紂。召太公望而問之曰:「吾欲不戰而知勝,不卜而知吉,使非其人,為之有道乎?」太公對曰:「有道。王得眾人之心,以圖不道,則不戰而知勝矣;以賢伐不肖,則不卜而知吉矣。彼害之,我利之。雖非吾民,可得而使也。」武王曰:「善。」乃召周公而問焉,曰:「天下之圖事者,皆以殷為天子,以周為諸侯,以諸侯攻天子,勝之有道乎?」周公對曰:「殷信天子,周信諸侯,則無勝之道矣,何可攻乎?」武王忿然曰:「汝言有說乎?」周公對曰:「臣聞之,攻禮者為賊,攻義者為殘,失其民制為匹夫王攻其失民者也,何攻天子乎?」武王曰:「善。」乃起眾舉師,與殷戰於牧之野,大敗殷人。上堂見玉,曰:「誰之玉也?」曰:「諸侯之玉。」即取而歸之於諸侯。天下聞之,曰:「武王廉於財矣。」入室見女,曰:「誰之女也?」曰:「諸侯之女也。」即取而歸之於諸侯。天下聞之,曰:「武王廉於色也。」於是發巨橋之粟,散鹿臺之財金錢以與士民,黜其戰車而不乘,弛其甲兵而弗用,縱馬華山,放牛桃林,示不復用。天下聞者,咸謂武王行義於天下,豈不大哉?

武王商紂를 토벌하려고 할 적에, 太公望을 불러서 물었다. “나는 교전하지 않고서도 승리함을 알고, 점을 치지 않고서도 吉함을 알며, 나의 백성이 아닌 사람을 부리려고 합니다. 이렇게 하는 데 방법이 있습니까?” 태공이 대답했다. “방법이 있습니다. 께서 많은 사람의 마음을 얻어서 無道한 임금을 도모하시면 교전하지 않고서도 승리함을 알고, 왕의 어진 으로 不肖한 임금을 토벌하면 점을 치지 않고서도 길함을 알며, 商紂는 백성을 해치는데 우리는 백성을 이롭게 하면 우리 백성이 아니더라도 부릴 수가 있습니다.”

무왕이 좋은 말이오.” 하고 이에 周公을 불러서 물었다. “천하의 큰일을 도모하는 사람은 모두 나라를 天子로 인정하고, 우리 나라를 諸侯로 인정하고 있다. 제후의 신분으로서 천자를 공격하여 승리할 방법이 있는가?” 주공이 대답했다. “은나라는 진실로 천자이고, 주나라는 진실로 제후라면 승리할 방법이 없습니다. 어떻게 공격할 수 있겠습니까.” 무왕이 분연히 노하여 말했다. “너는 이 말에 대한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느냐?”

주공이 대답했다. “신은 들으니, 禮義 있는 나라를 공격하는 것을 賊이라 하고, 道義 있는 나라를 공격하는 것을 殘이라 하니, 민심을 잃으면 匹夫라고 부릅니다. 왕은 백성을 잃은 사람을 공격하는 것이니, 어찌 천자를 공격하는 것이겠습니까.” 무왕이 좋은 말이다.” 하고는, 마침내 민중을 동원하고 군대를 출동하여 은나라와 牧野에서 전쟁하여 은나라 군대를 크게 패배시켰다.

무왕이 廟堂(朝廷)에 올라가 寶玉이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 “이것은 누구의 보옥인가?” 어떤 사람이 대답했다. “제후의 보옥입니다.” 즉시 보옥을 취해 제후에게 돌려주니, 천하 사람들이 이를 듣고 말했다. “무왕은 재물에 욕심이 없구나.” 방에 들어가 美女들이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 “누구의 미녀들인가?” 대답했다. “제후의 미녀들입니다.” 즉시 미녀들을 취하여 제후에게 돌려보내니 천하 사람들이 이를 듣고 말했다. “무왕은 女色에 욕심이 없구나.” 

무왕이 이에 巨橋의 곡식을 풀고, 鹿臺의 金錢을 흩어서 士民에게 주었다. 戰車를 폐기하여 타지 않고, 갑옷과 무기를 해체하여 사용하지 않으며, 말을 華山에 놓아주고, 소를 桃林에 풀어주어 다시는 전쟁에 사용하지 않겠다는 뜻을 보였다. 천하 사람들이 이를 듣고 모두들 말하였다. “무왕이 천하에 道義를 시행하니, 어찌 위대하지 않은가!”

17. 予將來征之,唯為民乃伐崇

文王欲伐崇,先宣言曰:「予聞崇侯虎,蔑侮父兄,不敬長老,聽獄不中,分財不均,百姓力盡,不得衣食,予將來征之,唯為民乃伐崇,令毋殺人,毋壞室,毋填井,毋伐樹木,毋動六畜,有不如令者死無赦。」崇人聞之,因請降。

文王나라를 토벌하려고 하면서 먼저 宣言하였다. “나는 들으니, 崇侯 虎父兄을 업신여기고 노인을 공경하지 않으며, 소송의 판결이 공정하지 않고 재물의 분배가 고르지 못하며, 백성들이 있는 힘을 다해 노력하는데도 입고 먹는 것을 얻지 못한다고 한다. 내가 가서 숭나라를 토벌하려는 것은 오직 백성을 위해서이다.

그러고는 마침내 숭나라를 토벌할 적에 군대에 명하여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말며, 집을 허물지 말며, 우물을 메우지 말며, 나무를 베지 말며, 六畜을 사용하지 말게 하였고, 만일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사형에 처하고 용서하지 않았다. 숭나라 백성들이 이 소문을 듣고 그대로 향복하기를 요청하였다.

 

18. 何不行列鼓出待之

楚莊王伐陳,吳救之,雨十日十夜晴。左史倚相曰:「吳必夜至,甲列壘壞,彼必薄我,何不行列鼓出待之。」吳師至楚,見成陳而還。左史倚相曰:「追之。」吳行六十里而無功,王罷卒寢。果擊之,大敗吳師。

나라가 나라를 토벌하니, 나라가 구원하였다. 열흘 밤낮을 비가 내리다가 날이 개니, 左史 倚相이 말했다. “오나라 군대는 반드시 밤에 습격해 올 것입니다. 우리 군대의 갑옷은 찢어지고 堡壘는 허물어졌으니, 저들은 반드시 우리를 얕볼 것입니다. 어찌 대오를 정비하고 북을 치면서 나가 기다리지 않습니까?

오나라 군대가 와서 초나라 군대가 陣勢를 이룬 것을 보고는 그대로 돌아갔다.

좌사 의상이 말했다. “추격하십시오. 오나라 군대가 60리를 행군하여 왔으나 세운 戰功이 없어 오왕은 지쳐 있고 병사는 쉬고 있을 것입니다.” 마침내 추격하여 오나라 군대를 크게 패배시켰다.

19. 其有聖人乎?

齊桓公之時,霖雨十旬。桓公欲伐漅陵,其城之值雨也,未合。管仲隰朋以卒徒造於門,桓公曰:「徒眾何以為?」管仲對曰:「臣聞之,雨則有事。夫漅陵不能雨,臣請攻之。」公曰:「善!」遂興師伐之。既至,大卒間外士在內矣,桓公曰:「其有聖人乎?」乃還旗而去之。

齊 桓公 때 장맛비가 백 일 동안 내렸다. 桓公漅陵을 토벌하려고 했는데, 漅陵에서 修築하다가 오랜 장맛비를 만나 끝마무리를 하지 못했다. 管仲隰朋이 병졸을 거느리고 宮門에 나아가니, 환공이 말했다. “병졸을 어디에 쓰려는 것이오?” 관중이 대답했다. “신은 들으니, 비가 오면 전쟁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소릉 사람들이 비를 견디지 못하고 있으니, 신은 공격하기를 청합니다.”

환공이 좋은 말이오.” 하고, 마침내 군대를 일으켜 소릉을 공격하였다. 그런데 소릉에 도착해보니, 많은 군대가 성 밖에 숨어 있고 甲士는 성 안에 숨어 있었다환공이 말했다. “이곳에는 아마 聖人이 있는 모양이다.”이에 깃발을 돌려서 떠났다.

20. 今君德無乃有所闕乎?胡不退脩德,無闕而後動。

宋圍曹,不拔。司馬子魚謂君曰:「文王伐崇,崇軍其城,三旬不降,退而脩教,復伐之,因壘而降。今君德無乃有所闕乎?胡不退脩德,無闕而後動。

나라가 나라를 공격하여 포위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司馬 子魚宋君에게 말했다. “文王나라를 정벌할 적에 숭나라 군대가 그 을 지켜 30일 동안 항복하지 않자, 퇴각하여 文敎를 닦고 다시 정벌하였는데, 보루를 수리하거나 군대를 증원하지 않고 옛 그대로의 軍勢를 이용하여 숭나라에 항복을 받았습니다. 지금 군주의 덕에 흠결이 있는 것은 아닌지요. 어찌 퇴각하여 덕을 닦아 흠결을 없앤 뒤에 군대를 일으켜 치지 않습니까.”

21. 夫五敗之人者,其懼甚矣,王姑少進。

吳王闔廬與荊人戰於柏舉,大勝之,至於郢郊,五敗荊人。闔廬之臣五人進諫曰:「夫深入遠報,非王之利也,王其返乎?」五將鍥頭,闔廬未之應,五人之頭墜於馬前,闔廬懼,召伍子胥而問焉。子胥曰:「五臣者懼也。夫五敗之人者,其懼甚矣,王姑少進。」遂入郢,南至江,北至方城,方三千里,皆服於楚矣。

吳王 闔廬()나라 사람과 柏擧에서 전쟁하여 크게 승리해 郊外에 이르기까지 다섯 차례나 형나라 사람을 패배시켰다. 합려의 신하 다섯 사람이 諫言을 올렸다. “적국에 깊숙이 들어가고 먼 곳에 와서 원한을 갚는 것은 께 이롭지 않으니, 왕께서는 그만 돌아가셔야 됩니다.”그러고는 다섯 사람이 자신의 머리를 베어 간하려고 하였다합려가 미처 대답하지도 않았는데, 다섯 사람의 머리가 합려의 말 아래 떨어졌다.

합려가 두려워서 伍子胥를 불러 묻자, 오자서가 말했다. “이 다섯 사람의 신하는 두려워한 것입니다. 남을 다섯 번 패배시킨 사람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심하니, 왕께서는 우선 조금 천천히 진군하십시오.” 마침내 에 들어가 남쪽으로는 長江까지, 북쪽으로는 方城까지 전진해 가서 사방 3천 리가 모두 오나라에 복종하였다.

(* 승승장구하거나 급격히 성장 중인 기업에게 들려줄 만한 말이다.)

22. 田成子因為旌節以起宰我之卒以攻之

田成子常與宰我爭,宰我夜伏卒,將以攻田成子,令於卒中曰:「不見旌節毋起。」鴟夷子皮聞之,告田成子。田成子因為旌節以起宰我之卒以攻之,遂殘之也。

田成子가 일찍이 宰我와 다투었는데, 재아가 밤에 병졸을 매복시키고 전성자를 공격할 태세를 취하고서 병졸들에게 명령하였다. “旌節을 보지 못하면 起動하지 말라.”

鴟夷子皮가 이를 듣고 전성자에게 고하자, 전성자는 이에 따라 정절을 위조하여 재아의 병졸들을 기동하게 하여 마침내 재아를 멸하였다.

(* 기밀의 누설)

23. 是我一舉而失兩也

齊桓公北伐山戎氏,請兵於魯,魯不與,桓公怒,將攻之,管仲曰:「不可,我已刑北方諸侯矣。今又攻魯,無乃不可乎?魯必事楚,是我一舉而失兩也。」桓公曰:「善!」乃輟攻魯矣。

齊 桓公이 북쪽의 山戎氏를 토벌하려고 나라에 援軍派兵을 요청하였는데, 노나라는 파병하지 않았다.

환공이 노하여 노나라를 공격하려고 하니, 管仲이 말했다. “안 됩니다. 우리가 이미 북방의 제후들을 처벌하였는데, 지금 또 노나라를 공격하면 不可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노나라를 공격하면노나라는 반드시 나라를 섬길 것이니, 이렇게 되면 우리는 한 번에 두 가지를 잃는 것입니다.” 환공이 좋은 말이오.” 하고, 이에 노나라를 공격하는 일을 중지하였다.

24. 先文德而後武力。凡武之興為不服也。

聖人之治天下也,先文德而後武力。凡武之興為不服也。文化不改,然後加誅。夫下愚不移,純德之所不能化而後武力加焉。

성인이 천하를 다스릴 때 文德(禮樂敎化)을 먼저 사용하고 武力은 뒤에 사용하니, 무력을 일으키는 것은 상대가 歸復하지 않기 때문이니, 文德敎化로도 달라지지 않은 뒤에 무력으로 토벌하는 것이다. 변화시킬 수 없는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순수한 덕으로도 교화되지 않은 뒤에 무력을 쓰는 것이다.

(* 先文德而後武力。凡武之興為不服也。먼저 문덕文德을 베푼 이후에 무력武力을 시행하다. 무력이 흥하면 불복이 따른다.)

25. 佞賊之人而不誅,亂之道也

昔堯誅四凶以懲惡,周公殺管蔡以弭亂,子產殺鄧析以威侈,孔子斬少正卯以變眾,佞賊之人而不誅,亂之道也。易曰:「不威小,不懲大,此小人之福也。」

예전에 四凶을 징벌하여 惡人을 징계하였고, 周公管叔蔡叔을 죽여서 반란을 평정하였으며, 子産鄧析을 죽여 방종한 사람을 두렵게 하였고, 孔子少正卯斬首하여 백성의 풍습을 바꾸었다.

아첨하고 음험한 사람을 징벌하지 않는 것은 환란을 부르는 길이니, 周易작은 에 위협을 가하지 않으며, 큰 악에 징벌을 내리지 않는 것, 이것이 小人이다.” 하였다.

26. 是故道非權不立,非勢不行,是道尊然後行。

五帝三王教以仁義而天下變也,孔子亦教以仁義而天下不從者,何也?昔明王有紱冕以尊賢,有斧鉞以誅惡,故其賞至重,而刑至深,而天下變。孔子賢顏淵,無以賞之,賤孺悲,無以罰之;故天下不從。是故道非權不立,非勢不行,是道尊然後行。

五帝와 三王은 仁義로 백성을 敎化하여 천하 사람들이 변화되었는데, 孔子 역시 인의로 백성을 교화하였으나 천하 사람들이 따르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예전의 현명한 제왕은 紱冕의 작위가 있어서 이로써 어진 이를 존중하고 斧鉞의 형벌이 있어서 이로써 악한 사람을 징벌하였다. 그러므로 으로 주는 벼슬은 지극히 무겁고, 을 징벌하는 형벌은 지극히 엄혹하여 천하 사람들이 변화한 것이다.

공자가 顔淵을 현명하게 여겼으나 상을 줄 수가 없고, 孺悲를 卑賤하게 여겼으나 징벌할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천하 사람들이 따르지 않은 것이다. 이 때문에 道는 권력이 아니면 수립되지 않고, 권세가 아니면 시행되지 않으니, 이는 도가 尊崇을 받고 난 뒤에 시행되는 것이다.

(* 是故道非權不立,非勢不行,是道尊然後行。도道는 권權이 있어야 바로 서고 세勢가 있어야 시행될 수 있으니, 道라는 것은 그것이 높이 받들여진(權) 다음에야 비로소 확산될 수 있다는(勢) 말이다. 權과 勢를 동반하지 않은 道는 공허하다.) 

27. 一曰心辨而險;二曰言偽而辯;三曰行辟而堅;四曰志愚而博;五曰順非而澤

孔子為魯司寇,七日而誅少正卯於東觀之下,門人聞之,趨而進,至者不言,其意皆一也。子貢後至,趨而進,曰:「夫少正卯者,魯國之聞人矣!夫子始為政,何以先誅之?」孔子曰:「賜也,非爾所及也。夫王者之誅有五,而盜竊不與焉。一曰心辨而險;二曰言偽而辯;三曰行辟而堅;四曰志愚而博;五曰順非而澤。此五者皆有辨知聰達之名,而非其真也。苟行以偽,則其知足以移眾,強足以獨立,此姦人之雄也,不可不誅。夫有五者之一,則不免於誅。今少正卯兼之,是以先誅之也。昔者湯誅蠋沐,太公誅潘阯,管仲誅史附里,子產誅鄧析,此五子未有不誅也。所謂誅之者,非為其晝則功盜,暮則穿窬也,皆傾覆之徒也!此固君子之所疑,愚者之所惑也。詩云:『憂心悄悄,慍于群小。』此之謂矣。」

孔子께서 나라의 司寇가 된 지 7일 만에 少正卯兩觀 아래에서 誅殺하셨다. 門人이 이 일을 듣고 달려왔는데, 도착한 사람들이 말은 하지 않았으나 그들의 마음에 품은 생각은 모두 같았다子貢이 뒤에 도착했는데 달려 나와 말했다. “소정묘는 노나라에서 이름난 사람인데, 선생님께서 처음 政事를 하시면서 어찌 이 사람을 먼저 죽이십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네가 알 수 있는 일이 아니다帝王이 주살하는 다섯 종류의 사람 중에 도둑질한 자는 그 안에 들어가지 않는다. 첫째는 道義를 거스르면서 마음이 음험한 자, 둘째는 거짓을 말하면서 達辯인 자, 셋째는 邪僻한 행위를 하면서 완고하여 변화되지 않는 자, 넷째는 뜻은 어리석으면서 식견이 넓은 자, 다섯째는 잘못을 합리화시키며 번지르르하게 꾸며대는 자이다.

이 다섯 종류의 사람은 모두 明辨하고 知識이 있고 聰明하고 通達하다는 명성이 있으나 진실이 아니다. 만일 이들이 虛僞로만 행하면 그들의 지혜는 군중의 마음을 바꾸고, 완강함은 세상에서 독립할 수 있다. 이는 간악한 사람 중의 걸출한 자이니, 주살하지 않을 수 없다. 다섯 가지 중에 한 가지라도 있으면 주살을 면하지 못하는데, 지금 소정묘는 다섯 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먼저 주살한 것이다.

예전에 湯王蠋沐을 주살하였고, 太公潘阯를 주살하였으며, 管仲史附里를 주살하였고, 子産鄧析을 주살하였으니, 이 다섯 사람은 주살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른바 이들을 주살해야 되는 까닭은 낮에는 남을 공격하여 재물을 빼앗고, 밤에는 남의 담을 뚫거나 넘어가서 도둑질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들은 모두 나라를 뒤엎는 무리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본디 君子는 의심이 생기게 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미혹하게 하는 자들이다. 詩經초초히 마음에 근심하는데, 여러 小人들에게 노여움을 받았네.’라 하였으니, 이런 사람을 두고 이른 말이다.”

(* 心辨而險, 言偽而辯, 行辟而堅, 志愚而博, 順非而澤. 깊이 생각해봐야 할 문장이다. 용서받지 못할 사람인지를 판단할 때 다섯 가지 점으로 나누어 본다. 心(마음), 言(말), 行(행동), 志(뜻), 順(도리, 좇음).  마음(心)의 辨而險, 말(言)의 偽而辯, 행동(行) 辟而堅, 뜻(志)의 愚而博, 도리(順)의 非而澤. 공자는 소정묘少正卯가 이 다섯 가지에 모두 해당한다고 판단하셨다.
이 문언은 荀子·宥坐篇, 孔子家語·始誅 등에도 등장하지만, 미묘하게 다른 부분도 있다.
* 공자가어 險, , , , 澤.
* 순자 一曰心而險, 而堅, 言偽而辯, 記醜而博, 五曰順非而澤.)

 

28. 臣聞聖人不言而知,非聖人者雖言不知。今欲言乎?無言乎?

<聖人은 남의 말을 듣지 않아도 알지만, 성인이 아닌 사람은 말을 듣더라도 알지 못하다고 합니다. 지금 제가 말하기를 바라십니까? 말하지 않기를 바라십니까?>

齊人王滿生見周公,周公出見之,曰:「先生遠辱,何以教之?」王滿生曰:「言內事者於內,言外事者於外,今言內事乎?言外事乎?」周公導入。王滿生曰:「敬從。」布席,周公不導坐。王滿生曰:「言大事者坐,言小事者倚。今言大事乎?言小事乎?」周公導坐。王滿生坐。周公曰:「先生何以教之?」王滿生曰:「臣聞聖人不言而知,非聖人者雖言不知。今欲言乎?無言乎?」周公俛念,有頃,不對。王滿生藉筆牘書之曰:「社稷且危,傅之於膺。」周公仰視見書曰:「唯!唯!謹聞命矣。」明日誅管蔡。

나라 사람 王滿生周公을 뵈려 하자, 주공이 나가 그를 접견하시고 말했다. “선생이 수고롭게 먼 길을 오셨으니, 무엇으로 나를 가르쳐주시렵니까?” 왕만생이 말했다. “朝廷 안의 일은 안에서 말하고, 조정 밖의 일은 밖에서 말하겠습니다. 지금 조정 안의 일을 말할까요? 조정 밖의 일을 말할까요?” 주공이 그를 인도하여 안으로 들어와 앉게 하니, 왕만생이 말했다. “공경히 명을 따르겠습니다.”

자리를 편 뒤에 주공이 그를 자리로 인도하지 않으니, 왕만생이 말했다. “大事를 말하려면 앉아서 하고, 小事를 말하려면 선 채 기대어 말하겠습니다. 지금 대사를 말할까요? 소사를 말할까요?” 주공이 그를 자리에 앉게 인도하니, 왕만생이 자리에 앉았다주공이 말했다. “선생은 무엇으로 나를 가르쳐주시렵니까?”

왕만생이 말했다. “저는 들으니, 聖人은 남의 말을 듣지 않아도 알지만, 성인이 아닌 사람은 말을 듣더라도 알지 못하다고 합니다. 지금 제가 말하기를 바라십니까? 말하지 않기를 바라십니까?

주공이 머리를 숙이고 한동안 생각만 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왕만생이 붓과 木簡을 빌려 社稷이 장차 위험하다.”라고 쓰고 그것을 가슴에 붙였다주공이 머리를 들어 그가 쓴 글을 보시고 말했다. “, 알겠소. 삼가 가르침대로 하겠습니다.”이튿날 管叔蔡叔을 주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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