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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習_아테나이칼럼/소구라 변리사의 지독지정(舐犢之情)

[소구라의 소언(搔言)]001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

by 변리사 허성원 2022. 8. 5.

[소구라의 소언(搔言)]001

오전에 상담한 특허 침해 건에 대해, 일단 경고장을 발송하기로 했다. 담당 변리사를 지정하고 업무 진행을 지시했다.

불과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경고장 초안이 내부 온라인 결재에 떴다. 내용 자체는 그럴듯하다. 원래 경고장이란 게 별 내용이 없다. 항상 그렇듯 건조하기 이를 데없는 뻔한 상투적인 언어들로 문장을 이룬다. 그러니 그대로 내보내더라도 별 문제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젊은 담당 변리사를 불러 몇 마디 잔소리를 해주었다.

.. 침해 분석을 직접 담당 했으니, 침해 팩트는 잘 파악하고 있을테고.. 특허권자와 침해자 양측의 실시 상황, 경쟁 혹은 우호 관계, 침해를 알게 된 과정, 침해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의 존재, 밸류체인에서의 마찰 여부, 특허권자가 원하는 해결방향, 미래 비즈니스 환경에서의 양자의 역학관계 등에 대해 파악하거나 생각해봤는가?

.. 이 경고장이 양측의 관계나 전략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 같은가. 혹 서로 잘되어 우호적인 비즈니스관계를 맺을 가능성이 있는가, 아니면 영원히 풀 수 없는 원한이 맺히게 되지는 않을 것인가, 우리 고객에게 단기적으로는 물론 장기적으로도 유리한가. 이 방법 외에 더 부드럽고 더 따뜻하고 더 유쾌하고 더 효과적인 방법은 없는가?

.. 경고장은 너무도 건조하고 딱딱하고 재미없는 것이지. 경고장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특허, 기술, 법률 등인데.. 이들은 모두 지독히도 인정머리가 없는 개념들이야. 비즈니스란 건 사람이 하는 일이야. 따뜻한 감성과 차가운 이성이 공존하는 일이지. 때론 전략이 결정하고 때론 기분이 판을 뒤엎기도 해. 경고장을 받아든 입장도 생각해보라구.

.. 이 모든 걸 잘 고려했다 하더라도, 이 경고장 내용 그대로 발송될 가능성이 있지. 정답일 수 있다는 말이지. 정답이라고 해서 반드시 좋은 답이 되는 것은 아닐 수 있다네. 그러니까.. 그건 마치 수학 문제를 풀 때 그 원리는 전혀 모르면서 정해진 공식만 대입하여 답을 찾아내는 것과 닮았다고 생각해. 우리는 정답을 찾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일의 근본 원리를 항상 깊이 고민해야 한다네.

.. 우리 변리사의 존재이유가 뭔가. 고객의 성공을 돕는 거잖아. 이 경고장을 작성하면서, 이것이 과연 우리 고객의 성공을 도울 수 있다는 확신이 들던가. 혹시 맡겨진 일꺼리 하나 해치운다는 마음으로 해치운 건 아니었나. 잊지 말게. 영원히 잊어서는 안되네. 우리는 왜 존재하고 왜 일을 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