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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習_아테나이칼럼/칼럼

[경남시론] 왕관은 차고에 벗어두고 오렴

by 변리사 허성원 2022. 4. 23.

왕관은 차고에 벗어두고 오렴

 

오랜만에 만난 그는 밝은 모습이었다. 몇 년 전 큰 어려움에 처한 그를 도와준 적이 있는데 이제 형편이 좋아진 듯하다. 다소 겸손이 과하다 여겨졌던 이전의 모습에 비해 이제는 자신감을 넘어 교만함이 엿보인다. 그런데 식사자리에서 크게 실망할 일이 벌어졌다. 종업원의 작은 실수에 대해 그가 너무 무례하고 과도하게 닦달하는 것이다. 지켜보는 나 자신이 그 종업원의 입장으로 추락한 것 같은 모멸감이 느껴졌다.

이런 사람은 장경오훼(長頸烏喙)형 인간이라 부를 수 있다. 장경오훼는 목이 길고 입이 까마귀 부리 같이 뾰족하다는 뜻이다. 범려(範蠡)는 월왕 구천이 오나라를 멸하는 데 큰 공을 세운 후, 곧 월나라를 떠나 제나라로 가서 절친한 문종(文種)에게 편지를 썼다. “날아다니는 새가 다 잡히면 활은 감추어지고(鳥尽弓蔵), 날랜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는 삶기게 되오(免死狗烹). 월왕의 사람됨이 목이 길고 입이 뾰족하니, 환란은 함께 할 수 있어도 즐거움은 함께 할 수가 없는 사람이오. 그대는 어찌 떠나지 않소?”(_사기 월왕구천세가)

범려는 관상학을 말하기보다, 월왕 구천의 인간적 특성을 그의 생긴 모습에 빗대어 표현한 듯하다. 구천은 오왕 부차에게 패하여 항복한 후, 스스로 부차의 신하가 되어 마구간 청소를 하고 심지어는 부차의 똥을 맛보기까지 하는 치욕을 견뎠다. 풀려난 후 장작 위에서 자고 쓸개를 핥으며(臥薪嘗膽) 복수를 다짐하고, 범려와 문종과 같은 충신들의 도움으로 마침내 오나라를 멸망시킨 후 중원의 패자가 된다. 그의 사람됨을 간파한 범려는 진작 떠나버렸지만, 남아있던 문종은 결국 토사구팽의 억울한 죽임을 당한다.

이처럼 구천은 집념이 강하여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어떤 수모도 감내한다. 어려울 때는 바싹 엎드려 어떻게 해서든 원하는 것을 얻어내고 난관을 벗어나지만, 목적을 달성했거나 형편이 좋아지면 고난을 함께 했던 사람의 은혜를 잊고 쉽게 교만에 빠진다. 남을 잘 믿지도 않고 가볍게 배신하며 욕심도 많다. 그래서 범려는 환란은 함께 할 수 있어도 즐거움은 함께 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장경오훼형 인간은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는 자신의 강함을 마음껏 휘두른다. 그런 부류를 쉽게 식별해 낼 수 있는 방법이 소위 '웨이터의 법칙'이다. 나에게는 친절하지만 식당의 웨이터나 다른 사람들에게 무례한 사람은 필시 장경오훼형 인간이다. 이런 사람들은 나를 필요로 할 때는 고개를 숙이고 다가오지만, 내가 힘이 없어지면 종업원을 대하듯 교만하고 무례하게 표변한다. 보잘것없는 성취에 도취되어 목을 길게 빼고 입을 뾰족히 내밀고 다니는 것이다. 비즈니스 관계에서 특히 경계하여야 할 대상이다.

진실한 관계는 어떤 상황에서든 변함없이 동고동락하는 사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항상 그럴 수는 없다. 부귀하여 좋은 상황일 때는 따르는 사람이 많고, 빈천하여 어려워지면 벗이 줄어드는 것(富貴多士 貧賎寡友 _ 사기 맹상군열전)이 인지상정이다. 그래서 역경이나 빈천을 이기기보다는 풍요나 부귀를 이기기가 훨씬 힘들다고 한다.

펩시콜라의 전 CEO 인드라 누이(Indra Nooyi)가 퇴근하여 집에 오니 엄마가 우유를 사오라고 심부름을 보낸다. 그녀는 심부름을 다녀와서 엄마에게 말했다. "난 펩시콜라의 최고경영자야. 그런 나에게 엄마는 겨우 우유 심부름을 시킨 거야." 그러자 엄마가 말했다. "회사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집에 들어올 때는, 왕관은 차고에 벗어두고 오렴."

성공의 마지막 도전 과제는 왕관을 내려놓아야만 통과할 수 있는 겸손의 관문이다. 온갖 난관을 극복하여 뜻한바 성취를 이루었다 하더라도 그 오만의 문턱에 걸려 멈추었다면 그것은 미완의 성공이다. 그래서 '겸손은 왕관 없는 존엄(_ 스펜서 킴벌)'이라 한다. 존엄한 성공에 경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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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다니는 새가 다 잡히면 좋은 활은 감추어지고, 날랜 토끼가 죽으면 사냥 개는 삶기게 된다오. 월왕의 사람됨이 목이 길고 입이 까마귀처럼 생겼으니, 환란은 같이할 수 있어도 즐거움은 같이할 수가  없는 사람이오. 그대는 어찌하여 떠나지 않소?” ( 蔵  烹.   去?) _ 越王句踐世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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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을 이기는 사람이 100명이라면, 풍요를 이기는 사람은 한 명도 되지 않는다. 출처:

 

** 왕관은 차고에 두고 와야해
“Leave the crown in the garage”

펩시콜라의 전 CEO 인드라 누이(Indra Nooyi)의 말이다.

나는 2001년 펩시콜라의 CEO로 지명된 날의 일을 잊을 수 없다. 그날 마침 엄마가 집에 와 있었다. 그 엄청난 소식을 말하려 하자, 엄마가 말했다. "그건 천천히 말해도 돼.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너가 나가서 우유를 사오는 일이야." 나는 나가서 우유를 사오고 나서야 그 엄청난 뉴스를 말할 수 있었다. "난 오늘 펩시콜라의 대표이사로 선임되었어. 그런 나에게 엄마는 겨우 우유 심부름을 시켰던 거야." 그러자 엄마가 말했다. "너는 펩시콜라와 같은 대단한 회사의 대표이사일 수도 있어. 하지만 이 집에 들어서면 무엇보다 아내이자 엄마인 거야. 아무도 너를 대신할 수 없어. 그러니 왕관은 차고에 두고 오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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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허한 태도는 왕관 없는 왕의 존엄이다’(_ 스펜서 킴벌).

Humility is royalty without a crown. - Spencer W. Kimba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