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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재산권보호/특허전략

'흰 코끼리' 특허를 죽여라

by 변리사 허성원 2019. 5. 4.

'흰 코끼리' 특허를 죽여라


'흰 코끼리'는 태국, 버마 등 동남아의 불교 국가에서 매우 신성하게 대접받는 존재이다. 드물게 태어나기도 하지만, 석가모니의 모친인 마야부인이 흰 코끼리가 옆구리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석가모니를 배태하였기 때문이다. 태국에서는 나라의 수호신으로 대접받기도 한다.
태국 등의 설화에 따르면, 국왕이 마음에 들지 않은 신하가 있으면 '흰 코끼리'를 선물한다고 한다. 신하의 입장에서는 국왕이 하사한 신성한 흰 코끼리를 정성을 다해 기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는 코끼리의 수명이 사람보다 길고 하루에 200kg 전후의 먹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코끼리를 죽을 때까지 건강히 기르려면 보통의 재력과 정성으로는 감당할 수 없으니, 그 신하의 물질적, 정신적 고통이 어느 정도일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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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별 쓸모도 없으면서, 유지 노력이나 비용은 많이 들고, 그렇다고 쉽게 버릴 수도 없는 그런 물건을 '흰 코끼리'라 부른다.
어느 회사나 가정에 그런 '흰 코끼리' 적잖이 있다. 비싸게 사서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데도 사연이 있어서나 들인 비용 때문에 남주기에는 아까운 그런 물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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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허 중에도 '흰 코끼리' 특허가 있다. 오래 전에 받아둔 특허들이다. 해당 사업을 이미 중단하였거나 다른 기술로 대체되어 아무런 실질적인 의미가 없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년 적어도 수십만원의 연차료를 내며 유지하고 있다. 특히 특허 연차료는 세월이 갈수록 더 비싸진다.

한물간(?) 특허를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그 특허가 언제 다시 경쟁자를 제압하는데 유용하게 쓰일 수도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특허 보유 건수가 주는 장식적 효과도 무시할 수 없다. 사업 초기에 경쟁사들과 좌충우돌 분쟁을 겪을 때 전투를 함께 치룬 동료 전사와 같아서 전우애 때문에 버릴 수 없다고 하는 이야기도 들어본 적이 있다.

특히 해외에서 취득한 특허는 그 비용 부담이 대단히 크다. 당초에 글로벌 비즈니스를 고려하여 공격적인 특허출원을 하였으나, 글로벌 정책은 뜻대로 되지 않고 특허만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 장래 그 비즈니스가 적절히 진행될 가능성이 매우 낮음에도 불구하고 꾸역꾸역 비싼 외국 연차료를 물고 있는 이유는 해외 출원 과정에 소요된 상당한 금액의 매몰 비용 때문에 차마 포기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특허는 나름의 활용도가 있거나 추억이든 사연이든 스토리가 있다면 지켜도 좋다, 지킬 필요가 있다면 비용이라도 최소화하는 노력을 할 수 있다. 특허에는 통상적으로 여러 개의 청구항이 있고, 청구항의 수에 따라 비용이 늘어난다. 그냥 보존의 의미만 있는 특허라면, 청구항을 하나만 남겨놓고 모두 삭제하는 것이 좋다. 그러면 최소한의 비용으로 특허는 유지할 수 있다.

장식적 효과 등의 의미가 없는 경우라면. 주기적으로 포기할 특허를 솎아내는 작업을 부단히 시행하여야 한다. 특허의 포기는 어느 개인 담당자가 맡기보다는 각 부서에서 차출된 복수의 위원으로 이루어진 특허 포기 심사위원회를 열어 여기서 심의를 거치는 것이 좋다. 개인 담당자는 만일의 잘못된 포기 처리가 가져올 심적 부담 때문에 소극적으로 임할 가능성이 크고, 각 부서의 담당자로 이루어진 위원회에서는 회사의 중장기 비전을 고려하여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