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고창신(法古創新)_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 '楚亭集序'(초정집서)
아아! 옛것을 본받는 것(法古)은
옛자취에 빠져 헤매는 병(病泥跡)이 되고,
새것을 창조한다는 것(創新)은
도리에 어긋날 우려(患不經)가 있다.
진실로 능히
옛것을 본받으면서도 변화를 알고(法古而知變),
새것을 창조하면서도 법도에 맞을 수 있다면(創新而能典)
지금의 글이 옛글과 같을 것이다.
噫! 法古者 病泥跡 創新者 患不經
苟能 法古而知變 創新而能典 今之文猶古之文也
_楚亭集序
刱(원문) = 創 비롯할 창, 苟 진실로 구, 猶 (오히려 유, 마땅히 유) 같을 유.
하늘과 땅이
비록 오래되었어도
끊없이 생명을 낳고,
해와 달이
아무리 오래되어도
그 빛은 날마다 새롭다.
天地雖久。不斷生生。日月雖久。光輝日新
글은 말을 다하지 못하고
그림을 뜻을 다하지 못한다.
書不盡言。圖不盡意。
** 원역문(한국고전종합DB 등을 참고하여 나름대로 조금 달리 해석하였음)
爲文章如之何。論者曰。必法古。世遂有儗摹倣像而不之耻者. 是王莽之周官。足以制禮樂。陽貨之貌類。可爲萬世師耳。法古寧可爲也。
문장을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 따지기 좋아하는 자들은 반드시 '법고(法古)' 즉 옛것을 본받아야 한다고 한다. 그러면 세상에는 흉내내고 베끼고 본받고 본뜨면서도 그 짓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는 한나라의 황제 자리를 찬탈한 왕망(王莽)이란 자가 옛 주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관제를 만들었다고 해서, 그것을 나라의 법제로 정해도 된다는 말이며, 옛 노나라의 국정을 농단한 양화(陽貨)의 얼굴이 공자와 닮았다 하여 만세의 스승노릇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니, 어찌 법고(法古)가 옳다고만 하겠는가.
然則刱新可乎。世遂有恠誕淫僻而不知懼者。是三丈之木。賢於關石。而延年之聲。可登淸廟矣。刱新寧可爲也。
그렇다면 '창신( 刱新)' 즉 새로운 것을 창조해야만 옳은가. 그러면 세상에는 괴이하고 허황되고 음란하고 편벽한 글을 쓰면서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자들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는 진나라 때 상앙(商鞅)이 임시로 세워놓았던 세 발 장대 나무가 법규정을 새긴 관석보다 낫다 하고, 한나라 때 뛰어난 가수였던 이연년(李延年)의 노래를 종묘 제례악으로 올릴 수 있다는 셈이 되니, 어찌 창신(刱新)이 옳다고만 하겠는가.
夫然則如之何其可也。吾將奈何無其已乎. 噫。法古者。病泥跡。刱新者。患不經。苟能法古而知變。刱新而能典。今之文。猶古之文也
그렇다면 어떡해야 좋단 말인가? 나는 이제 글 짓기를 그만두어야 하는가?
아! ‘법고’는 옛 자취에 얽매일까 근심이고, ‘창신’은 도리를 벗어날까 걱정이다. 참으로 ‘법고’하면서도 변통을 알고 ‘창신’하면서도 도리에 맞다면, 지금의 글이야말로 바로 옛글인 것이다.
古之人有善讀書者。公明宣是已。古之人有善爲文者。淮陰侯是已。何者。 公明宣學於曾子。三年不讀書。曾子問之。對曰。宣見夫子之居庭。見夫子之應賓客。見夫子之居朝廷也。學而未能。宣安敢不學而處夫子之門乎。背水置陣。不見於法。諸將之不服固也。乃淮陰侯則曰此在兵法。顧諸君不察。兵法不曰置之死地而後生乎。
옛사람 중에 글 잘 읽은 이가 공명선(公明宣)이요, 옛사람 중에 글을 잘 짓는 이가 회음후(淮陰侯) 한신이다. 어찌 그런가?
공명선이 증자(曾子)에게 배웠는데 3년 동안이나 책을 읽지 않기에, 증자가 그 까닭을 물었더니 대답하였다. “저는 선생님께서 집에 계신 모습, 손님 응대하시는 모습, 조정에 계신 모습을 보고 배웠으나 아직 능히 실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어찌 감히 배우는 것 없이 선생님의 문하에 머무르겠습니까.”
강물을 등지고 진을 치는 배수진은 병법에서 볼 수 없으니, 여러 장수들이 그에 따르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이에 회음후는 말했다. “이것은 병법에 나와 있지만 단지 그대들이 제대로 그 뜻을 살펴서 알지 못했을 따름이다. 병법에 ‘사지에 몰린 후에야 살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故不學以爲善學。魯男子之獨居也。增竈述於减竈。虞升卿之知變也。
그러므로 무턱대로 남의 사례를 따라 배우지 않아야만 제대로 잘 배우는 것이라 하는 것이다. 유하혜(柳下惠)는 얼어죽을 처지의 여성을 몸으로 따뜻히 녹여주었지만, 노나라 남자는 폭풍우에 집이 무너져 하루밤을 부탁하는 과부의 요청을 거부하였다. 유하혜라면 그리 해도 되지만 자신은 그 일을 감당할 수 없었기에 그의 행동을 따르지 않은 것이다. 손빈은 방통을 피해 달아나면서 아궁이의 수를 점차 줄여서 병력이 줄어든 것으로 보이게 했지만, 후한 때의 우승경(虞升卿)은 오히려 아궁이의 수를 늘려 병력에 점차 늘어난 것처럼 보이게 했다. 이는 전술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由是觀之。天地雖久。不斷生生。日月雖久。光輝日新。載籍雖博旨意各殊。故飛潛走躍。或未著名。山川草木。必有秘靈。朽壤蒸芝。腐草化螢。
이들로부터 보건대, 하늘과 땅이 아무리 오래되었어도 끊임없이 새 생명을 낳고, 해와 달이 아무리 오래되었어도 그 빛은 날마다 새롭다. 그렇듯이 서책이 비록 방대하게 많지만 거기에 담긴 뜻은 제각기 다르다. 그러기에 날고 헤엄치고 달리고 뛰는 동물들 중에 아직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것도 있고, 산천초목 중에도 필시 신비로운 영물(靈物)이 있으며, 썩은 흙에서 버섯이 자라나고, 썩은 풀이 반디불이로 변한다.
禮有訟。樂有議。書不盡言。圖不盡意。仁者見之謂之仁。智者見之謂之智。
또한 예법(禮法)에 대해서도 다툼이 있고 음악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글은 말을 다하지 못하고 그림은 뜻을 다하지 못한다. 어진 이는 어떤 것을 보고 ‘인(仁)’이라 부르고, 슬기로운 이는 그것을 보고 ‘지(智)’라 부른다.
故俟百世聖人而不惑者。前聖志也。舜禹復起。不易吾言者。後賢述也。禹,稷,顔回其揆一也。隘與不恭。君子不由也。
그러므로 군자의 도는 백세(百世) 이후의 성인도 미혹되지 않는 것이라 하였는데, 이는 앞서 살았던 성인인 공자의 뜻이요, 순 임금과 우 임금이 다시 태어난다 해도 내 말을 바꾸지 않으리라 한 것은 후세에 살았던 현인인 맹자가 한 말이다. 우 임금과 후직(后稷), 안회(顔回)는 살던 장소와 시대가 아주 멀지만 그 삶의 도리는 한 가지였고, 백이(伯夷)의 지나친 결벽과 유하혜(柳下惠)의 지나친 무례함은 군자들은 따르지 않는다.
朴氏子齊雲年二十三。能文章。號曰楚亭。從余學有年矣。其爲文慕先秦,兩漢之作。而不泥於跡. 然陳言之務祛則或失于無稽。立論之過高則或近乎不經。
박씨의 아들 제운(齊雲)이 나이 스물셋에 문장에 능하고, 호를 초정(楚亭)이라 하며, 나를 따라 배운 지 여러 해가 되었다. 그는 글을 짓는 데 있어 옛 진(秦)나라와 한나라의 작품을 흠모하면서도 옛 발자취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러나 진부한 말을 떨어내려 애쓰다 보니 자칫 논점을 잃기도 하고, 논지를 너무 높게 설정하여 경계를 벗어나기도 한다.
此有明諸家於法古刱新。互相訾謷而俱不得其正。同之並墮于季世之瑣屑。無裨乎翼道而徒歸于病俗而傷化也。吾是之懼焉。與其刱新而巧也。無寧法古而陋也。
이와 같이 명나라의 여러 작가들도 ‘법고’와 ‘창신’에 대하여 서로 헐뜯기만 하다가 아무도 무엇이 옳은지를 깨닫지 못한 채, 다 함께 말세의 자질구레한 혼탁함에 떨어져, 도를 바로세우는 데는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고, 풍속을 병들게 하여 교화를 해치는 꼴이 되고 말았다. 나는 이것이 두려운 것이다.
‘창신’을 한답시고 기교를 부리기보다는, 차라리 ‘법고’하여 고루하고 말리라.
吾今讀其楚亭集。而並論公明宣,魯男子之篤學。以見夫淮陰,虞詡之出奇。無不學古之法而善變者也。夜與楚亭言如此。遂書其卷首而勉之。
내 지금 '초정집'을 읽으면서 공명선과 노나라 남자의 두터운 배움과 회음후와 우후(虞詡)의 융통성을 함께 논한 것은, 이들이 모두 옛것을 배웠으되 변통에 능하였기 때문이다. 밤에 초정(楚亭)과 더불어 이런 이야기들을 나누고서, 마침내 그 책의 첫머리에 글을 써서 이를 격려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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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격의 아이콘을 소개합니다
연암 박지원은 한양의 이름 높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적부터 글 솜씨가 좋았다. 조선은 알다시피 문(文)을 숭상하던 나라였다. 글을 잘 쓴다는 것은, 날개를 가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얼마나 뛰어난 재능을 가졌던지,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들 그와 가까워지려고 애썼다. 그의 특별한 글재주는 왕과 고위 벼슬아치에게도 알려졌다. 그들은 언젠가 박지원도 벼슬을 얻어 함께 할 날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박지원은 출세에 별 관심이 없었다. 집안 어른의 성화에 서른세 살에 처음 과거시험을 보았고 1차 시험에 1등을 했다. 영조 임금이 그를 불러 직접 격려하기까지 했지만, 두 번째 시험에서 백지를 내고 나왔다고 한다. 영조 임금이 다시 한 번 기회를 줬는데, 이번엔 종이에 그림을 그려 냈다고 한다. 그는 후에 과거를 다시 보긴 했지만 낙방한 후 과거 시험은 접고 학문 연구에 매진했다. 그의 학식과 문장력으로 인해 정조 시절에 수없이 관직에 추천됐지만, 번번이 사양하다가 나이 50세가 돼서야 처음 관직에 올랐다고 한다.
** 참고한 글
https://leeza.tistory.com/1044
** 영처고서(嬰處稿序)
https://athenae.tistory.com/448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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