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경영과 세상살이/열하일기

법고창신(法古創新) _ 연암 박지원(朴趾源) '楚亭集序(초정집서)

by 변리사 허성원 2019. 1. 13.


법고창신(法古創新)_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 '楚亭集序'(초정집서)



아아! 옛것을 본받는 것(法古)

옛자취에 빠져 헤매는 병(病泥跡)이 되고,

새것을 창조한다는 것(創新)

 법도에 어긋날 우려(患不經)가 있다. 

진실로 능히

옛것을 본받으면서도 변화를 알고(法古而知變)

새것을 창조하면서도 법도에 맞을 수 있다면(新而能典) 

지금의 글이 옛글과 같을 것이다.

 

噫! 法古者 病泥跡 創新者 患不經
法古而知變 新而能典 今之文猶古之文也
_楚亭集序

 

刱(원문) = 創 비롯할 창, 苟 진실로 구, 猶 (오히려 유, 마땅히 유) 같을 유.

 

 

** 원역문(참고 출처)

 

爲文章如之何。論者曰。必法古。世遂有儗摹倣像而不之耻者
문장을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 논자(論者)들은 반드시 ‘법고(法古 옛것을 본받음)’해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마침내 세상에는 옛것을 흉내 내고 본뜨면서도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가 생기게 되었다.

 

是王莽之周官。足以制禮樂。陽貨之貌類。可爲萬世師耳。法古寧可爲也。

이는 왕망(王莽)의 <주관(周官)>으로 족히 예악(禮樂)을 제정할 수 있고, 양화(陽貨)가 공자와 얼굴이 닮았다 해서 만세의 스승이 될 수 있다는 셈이니, 어찌 ‘법고’를 해서 되겠는가.

 

然則刱新可乎。世遂有恠誕淫僻而不知懼者。是三丈之木。賢於關石。而延年之聲。可登淸廟矣。刱新寧可爲也。

그렇다면 ‘창신(刱新, 새롭게 창조함)’이 옳지 않겠는가. 그래서 마침내 세상에는 괴벽하고 허황되게 문장을 지으면서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자가 생기게 되었다. 이는 세 발[丈] 되는 장대가 국가 재정에 중요한 도량형기(度量衡器)보다 낫고, 이연년(李延年)의 신성(新聲)을 종묘 제사에서 부를 수 있다는 셈이니, 어찌 ‘창신’을 해서 되겠는가.

 

夫然則如之何其可也。吾將奈何無其已乎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옳단 말인가? 나는 장차 어떻게 해야 하나? 아니면 문장 짓기를 그만두어야 할 것인가? 

 

噫。法古者。病泥跡。刱新者。患不經。苟能法古而知變。刱新而能典。今之文。猶古之文也

아! 소위 ‘법고’한다는 사람은 옛 자취에만 얽매이는 것이 병통이고, ‘창신’한다는 사람은 상도(常道)에서 벗어나는 게 걱정거리이다. 진실로 ‘법고’하면서도 변통할 줄 알고 ‘창신’하면서도 능히 전아하다면, 요즈음의 글이 바로 옛글인 것이다.

 

古之人有善讀書者。公明宣是已。古之人有善爲文者。淮陰侯是已。何者。

옛사람 중에 글을 잘 읽은 이가 있었으니 공명선(公明宣)이 바로 그요, 옛사람 중에 글을 잘 짓는 이가 있었으니 회음후(淮陰侯)가 바로 그다. 그것이 무슨 말인가?

 

公明宣學於曾子。三年不讀書。曾子問之。對曰。宣見夫子之居庭。見夫子之應賓客。見夫子之居朝廷也。學而未能。宣安敢不學而處夫子之門乎。背水置陣。不見於法。諸將之不服固也。乃淮陰侯則曰此在兵法。顧諸君不察。兵法不曰置之死地而後生乎。
공명선이 증자(曾子)에게 배울 때 3년 동안이나 책을 읽지 않기에 증자가 그 까닭을 물었더니, 
“제가 선생님께서 집에 계실 때나 손님을 응접하실 때나 조정에 계실 때를 보면서 그 처신을 배우려고 하였으나 아직 제대로 배우지 못했습니다. 제가 어찌 감히 아무것도 배우지 않으면서 선생님 문하에 머물러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 
물을 등지고 진(陣)을 치는 배수진(背水陣)은 병법에 보이지 않으니, 여러 장수들이 불복할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회음후는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병법에 나와 있는데, 단지 그대들이 제대로 살피지 못한 것뿐이다. 병법에 그러지 않았던가? ‘죽을 땅에 놓인 뒤라야 살아난다’고.” 


故不學以爲善學。魯男子之獨居也。增竈述於减竈。虞升卿之知變也。

그러므로 무턱대고 배우지는 아니하는 것을 잘 배우는 것으로 여긴 것은 혼자 살던 노(魯) 나라의 남자요, 아궁이를 늘려 아궁이를 줄인 계략을 이어 받은 것은 변통할 줄 안 우승경(虞升卿)이었다.

 

由是觀之。天地雖久。不斷生生。日月雖久。光輝日新。載籍雖博旨意各殊。故飛潛走躍。或未著名。山川草木。必有秘靈。朽壤蒸芝。腐草化螢。

이로 말미암아 보건대, 하늘과 땅이 아무리 장구해도 끊임없이 생명을 낳고, 해와 달이 아무리 유구해도 그 빛은 날마다 새롭듯이, 서적이 비록 많다지만 거기에 담긴 뜻은 제각기 다르다. 그러므로 날고 헤엄치고 달리고 뛰는 동물들 중에는 아직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것도 있고 산천초목 중에는 반드시 신비스러운 영물(靈物)이 있으니, 썩은 흙에서 버섯이 무럭무럭 자라고, 썩은 풀이 반디로 변하기도 한다

 

禮有訟。樂有議。書不盡言。圖不盡意。仁者見之謂之仁。智者見之謂之智。

또한 예에 대해서도 시비가 분분하고 악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문자는 말을 다 표현하지 못하고 그림은 뜻을 다 표현하지 못한다. 어진 이는 도를 보고 ‘인(仁)’이라고 이르고 슬기로운 이는 도를 보고 ‘지(智)’라 이른다.

 

故俟百世聖人而不惑者。前聖志也。舜禹復起。不易吾言者。後賢述也。禹,稷,顔回其揆一也。隘與不恭。君子不由也。

그러므로 백세(百世) 뒤에 성인이 나온다 하더라도 의혹되지 않을 것이라 한 것은 앞선 성인의 뜻이요, 순 임금과 우 임금이 다시 태어난다 해도 내 말을 바꾸지 않으리라 한 것은 뒷 현인이 그 뜻을 계승한 말씀이다. 우 임금과 후직(后稷), 안회(顔回)가 그 법도는 한 가지요, 편협함[隘]과 공손치 못함[不恭]은 군자가 따르지 않는 법이다.

 

朴氏子齊雲年二十三。能文章。號曰楚亭。從余學有年矣。其爲文慕先秦,兩漢之作。而不泥於跡

박씨의 아들 제운(齊雲)이 나이 스물셋으로 문장에 능하고 호를 초정(楚亭)이라 하는데, 나를 따라 공부한 지 여러 해가 되었다. 그는 문장을 지음에 있어 선진(先秦)과 양한(兩漢) 때 작품을 흠모하면서도 옛 표현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러나 진부한 말을 없애려고 노력하다 보면 혹 근거 없는 표현을 쓰는 실수를 범하기도 하고, 내세운 주장이 너무 고원하다 보면 혹 상도(常道)에서 자칫 벗어나기도 한다.

 

然陳言之務祛則或失于無稽。立論之過高則或近乎不經。此有明諸家於法古刱新。互相訾謷而俱不得其正。同之並墮于季世之瑣屑。無裨乎翼道而徒歸于病俗而傷化也。吾是之懼焉。與其刱新而巧也。無寧法古而陋也。

이래서 명나라의 여러 작가들이 ‘법고’와 ‘창신’에 대하여 서로 비방만 일삼다가 모두 정도를 얻지 못한 채 다 같이 말세의 자질구레한 폐단에 떨어져, 도를 옹호하는 데는 보탬이 없이 한갓 풍속만 병들게 하고 교화를 해치는 결과를 낳고 만 것이다. 나는 이렇게 되지나 않을까 두렵다. 그러니 ‘창신’을 한답시고 재주 부릴진댄 차라리 ‘법고’를 하다가 고루해지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吾今讀其楚亭集。而並論公明宣,魯男子之篤學。以見夫淮陰,虞詡之出奇。無不學古之法而善變者也。夜與楚亭言如此。遂書其卷首而勉之。

내 지금 <초정집>을 읽고서 공명선과 노나라 남자의 독실한 배움을 아울러 논하고, 회음후와 우후(虞詡)의 기이한 발상이 다 옛것을 배워서 잘 변화시키지 않은 것이 없음을 나타내 보였다. 밤에 초정(楚亭)과 함께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는 마침내 그 책머리에 써서 권면하는 바이다.


論文正經曉人處。如銅環上銀星。可以暗摹而知尺寸。 
文有兩扇。一爲斷崖。一爲長江。有明諸家相訾謷。莫可歸一。斯可謂片言折獄

문장을 논한 정도(正道)라 하겠다. 사람을 깨우치는 대목이 마치 구리 고리 위에 은빛 별 표시가 있어 안 보고 더듬어도 치수를 알 수 있는 것과 같다.  

이 글에는 두 짝의 문이 있는데, 하나는 끊어진 벼랑이 되고, 다른 하나는 긴 강물이 되었다. ‘명나라의 여러 작가들이 서로 비방만 일삼다가 하나로 의견이 합치하지 못하고 말았다.’고 한 말은 편언절옥(片言折獄)이라고 이를 만하다
(참조 : http://blog.daum.net/telechae/16913349)

 

**

파격의 아이콘을 소개합니다

 

파격의 아이콘을 소개합니다 - 더칼럼니스트

사회 지도층 자제의 부모 찬스를 통한 스펙 쌓기 뉴스는 이제 새로운 뉴스거리도 아니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처럼 잊을 만하면 들려온다. 아니나 다를까, 지난 4월 말에 진행되었던 새 정부의 장

www.thecolumnist.kr


연암 박지원은 한양의 이름 높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적부터 글 솜씨가 좋았다. 조선은 알다시피 문(文)을 숭상하던 나라였다. 글을 잘 쓴다는 것은, 날개를 가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얼마나 뛰어난 재능을 가졌던지,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들 그와 가까워지려고 애썼다. 그의 특별한 글재주는 왕과 고위 벼슬아치에게도 알려졌다. 그들은 언젠가 박지원도 벼슬을 얻어 함께 할 날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박지원은 출세에 별 관심이 없었다. 집안 어른의 성화에 서른세 살에 처음 과거시험을 보았고 1차 시험에 1등을 했다. 영조 임금이 그를 불러 직접 격려하기까지 했지만, 두 번째 시험에서 백지를 내고 나왔다고 한다. 영조 임금이 다시 한 번 기회를 줬는데, 이번엔 종이에 그림을 그려 냈다고 한다. 그는 후에 과거를 다시 보긴 했지만 낙방한 후 과거 시험은 접고 학문 연구에 매진했다. 그의 학식과 문장력으로 인해 정조 시절에 수없이 관직에 추천됐지만, 번번이 사양하다가 나이 50세가 돼서야 처음 관직에 올랐다고 한다.

**
연암 박지원의 ‘조선풍(朝鮮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