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유공자비 건립식 참석기
청파 박 행 일
전 미국 대통령 오바마는 이국 땅 아프가니스탄 전투에서 전사한 미군 병사들을 맞이하기 위해 새벽 2시에 공항에 나갔다. 성조기에 덮인 병사들의 시신 앞에 거수경례로 그들을 정중하게 영접했다. 아! 저것이 미국 장병들의 명예를 지키는 국가원수의 정신이구나, 보는 이들의 가슴을 뜨겁게 했다. 그들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병사들에게는 국가가 그 공적을 잊지 않고 높이 예찬한다는 확신을 온 국민들에게 심어주었다.
우리는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군인 용사들의 몇 주기 추모행사에 대통령이 참석했느냐, 안했느냐 하면서 차갑게 논쟁을 일삼는 기사를 보았다. 나라에 안보 정신보다 우선하는 일이 어디 있으랴?
이제 해방이 된 지도 어언 70여 성상이 흘렀다. 3.1절 행사가 전국 곳곳에서 진행된다.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겠다며 목숨 걸고 싸워온 순국선열들을 우리는 지금까지 어떤 태도로 기려왔는지를 돌아볼 일이다.
나는 지난 3월 2일 경남 김해 연지공원에서 한국유림 독립운동 파리장서 유공자비 제막식에 참석했다. 한국유림학자들이 일제에 항거하여 연명한『파리장서』를 만국평화회의장 프랑스 파리에 보낸 사건을 기리는 비다. 이는 경남도비와 김해시비로 건립한 비의 제막식이다.
「파리장서」는 전국 유림학자 대표 137인이 일제의 핍박과 위협에 굴하지 않고 대한민국은 자주독립국임을 세계만방에 당당히 주창한 독립운동이다.
암울한 일제강점기에 삼엄한 경계를 피해 전국 유림학자들이 비밀리에 뜻을 모아 연명을 했다. 당시 일제에 항거하여 서명하는 일은 목숨을 건 결단이기도 했다. 까닭은 자신의 고초는 물론 가솔들의 고통도 각오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당시「파리장서」에 서명한 김해 출생 유림학자 네 분 중에 한 분이 저자의 처조부인 거인(居仁)류진옥(柳震玉)선생님이다.
부산일보 기사를 빌리면, 거인 류진옥 선생은 용단을 내려 파리장서에 서명한 후 경찰에 잡혀가 많은 고초를 겪기도 했다. 그리고 평생 동안 왜경의 감시 대상자가 되었다. 그 후 선생은 김해 청산정(淸山亭)에서 후학들에게 강학(講學)을 통하여 애국애족 정신을 고취시켜 나갔다.
선생은 총명이 과인하고 평소에 몸가짐이 깨끗하고 처신함이 속되지 않았다. 시문과 학덕이 뛰어나 주변 학인들까지 공경하는 김해지방의 삼옥(三玉) 중의 한 분이라 한다. 선생의 실천적 지식인으로 독립운동과 민족교육에 헌신한 그 공적들을 기려 정부에서는 건국포장 서훈을 추서했다. 선생이 남긴 저서로는 거인유고(居仁遺稿) 5권이 전한다.
나는 오래 전에 아내와 함께 서울 장충단공원을 찾았다. 그곳에 「한국독립운동 파리장서비」가 세워져 거인 선생의 존함이 있다기에 갔다.
그런데 이「파리장서비」는 당시는 나라 살림이 궁핍하여 정부지원 일부와 그 후손들이 십시일반 모금하여 세워졌다고 한다. 그때 이 비석을 세우기 위해 추진한 분의 말을 빌리면 안타까운 이야기들이 많다.
모금을 위해 유족 집집을 찾아 갔을 때, 일부 집안은 쇠퇴, 몰락하여 없거나, 또는 가난하여 자식이 나뭇짐을 지고 집으로 들어오는데 차마 돈 이야기를 입에 담기가 민망스럽더라고 회고했다. 그래서 사정이 너무 딱한 집에는 오히려 돈을 주고 왔다고 전했다. 또, 어떤 유족은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쳤기에 후손은 가난을 견디지 못해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고 있더라고 한다.
서슬이 퍼런 일제치하에 독립운동을 하면 당사자는 물론 그 가족들이 편안하게 생활하도록 두지를 않았다. 온갖 꼬투리를 잡아 투옥시켜 고문하고 문초하여 닦달하거나 요주의 인물로 지정하여 항상 그들의 주변 사람들이 감시 속에 생활하도록 했다. 본인은 물론 그 가족들이 격은 고초는 일일이 열거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있다. 이 말 속에는 왜경이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가문을 철저하게 망하도록 괴롭혔다는 말이다. 그 여파로 독립운동가의 후손들 가운데는 지금도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가문이 많다. 중국군 중장까지 올라 항일 전쟁을 이끈 이상정 장군의 후손은 15만 원짜리 사글세방에서 기초생활수급자로 살고 있다는 신문기사다. 이처럼 해방 후에도 빈곤층으로 전락해 버린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많다. 일부 독립투사는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친 후 가족을 돌보지 못해 자식들은 배우지 못하고 무지와 가난 속에 허덕인 경우가 한둘이 아니라 한다.
이와 반대로 친일하던 이의 자식들은 대부분 대학공부를 마치거나 또는 유학까지 하고 돌아와 곳곳에 내로라하는 요직을 차지하고 앉아 덩덩거리며 잘 살았다. 또 일제치하에서 순사로 살면서 독립 운동가들을 잡아 온갖 고문을 일삼던 사람이 해방 후에도 경찰 간부가 되어 애국지사를 잡아 다시 사상이 의심스럽다면서 치조하더라는 웃지 못 할 일화가 전한다.
전광용이 쓴 「꺼삐딴 리」란 소설이 생각난다. 주인공 이인국이란 의사는 일제시대에는 친일로, 러시아의 지배권에 있을 때는 친 러시아로, 또 미국의 지배권에서는 친미로 살아가며 온갖 영화를 누리는 꺼삐딴 리가 된다. 어려움에 처한 조국과 사회를 외면한 채 오직 자신의 영화로운 삶을 위해 그때그때 적당히 눈치 보면서 빌붙어 살면 된다는 생각을 하는 전형적인 매국노다. 바르게 심판하고 역사를 바로 세우지 못하면 이런 인간들이 득세를 하는 나라가 된다.
혹자는 해방 후 나라에 인재가 없어 할 수 없이 친일 세력들을 채용한 것이라 변명한다. 혹은 미군정이 다스리고 있어 우리가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 이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구차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리 위급하고 늦어도 할 일과 아니 해야 할 일이 있다. 이는 두고두고 이 나라의 정통성에 짊이 될 일이다.
역사를 바르게 정립하지 못한 나라는 자긍심을 기대할 수 없다. 또한 나라의 역사는 하루아침에 정통성이 이룩되는 법도 아니다. 뿌리부터 바르게 심어져 바르게 자라도록 해야 역사가 제대로 세워져 국가 미래가 밝은 법이다.
미국은 보훈장관을 국무위원 네 번째 서열에 두고 순국한 선열들에게 철저하게 보상하고 최상의 정신적 위무를 아끼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도 나라를 위해 몸 바친 선열과 병사들에게는 대통령이 꼭두새벽이라도 달려가 정중하게 예를 갖추어 맞이하는 풍토가 하루속히 조성되기를 나는 희망한다.
나는 제막식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면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거인 선생의 생전의 삶을 연상하며 새김질해 보았다. 나라 잃은 유학자로 얼마나 가슴 아픈 울분의 나날을 사셨을까? 그리고 후손들의 삶이 얼마나 고달팠을까? 거인의 올곧은 애국정신을 받들며 오늘을 사는 후손들의 자긍심에 나는 찬사를 보냈다. 그리고 조용히 옆에 앉은 아내의 손을 잡고 묵도(黙禱)를 올렸다.
* 이 글이 다른 비공개 카페에 실려있어 찾아 읽기가 쉽지 않기에 여기에 옮겨 실었다.
* 거인 류진옥 선생은 나의 처증조부이시다.
* 이 글을 쓰신 청파 박행일 선생님은 나의 처고부님이시다. 언제나 뵐 때마다 위트 넘치는 멋진 말씀으로 가르침을 주시며, 교직에서 정년 퇴직하신 후 시인으로서 활동하시며 '흐르는 강물은 마침표가 없다', '그리운 흔적만으로도 머물고 싶은 자리' 등 다수의 시집을 출간하셨다.
* 김해의 파리장서 유공자비 제막식은 2017년 3월2일에 김해 연지공원에서 거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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