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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성원 변리사 칼럼] # 사람은 무엇으로 움직이는가

by 변리사 허성원 2026. 5. 17.

사람은 무엇으로 움직이는가

 

같은 일임에도, 매를 맞으면서도 하기 싫은 일이 있는가 하면, 엄한 벌이 예상되어도 저지르고 싶은 일이 있다. 넉넉한 보상이 보장되는데도 즐겁지 않은 일이 있는가 하면, 아무 보상이 없음에도 스스로 즐겨 하는 일이 있다.

그런 심리들은 어디에서 오는가.

행위 자체는 같은데 심리가 정반대로 갈리는 이 분기점을 찾는 일은, 사람을 움직이려는 모든 자에게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다. 부모, 교사, 리더, 정치인, 마케터,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무언가를 행동하게 만들려는 모든 사람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 답을 찾고자 했다.

군주의 두 칼자루

사람을 움직이는 데에는 두 가지 고전적 기법이 있다. 강제와 보상이다. 한비자는 이를 '이병(二柄)', 곧 군주의 두 칼자루라 했다.

"밝은 군주가 신하를 이끌어 제어하는 데에는 두 개의 칼자루가 있을 뿐이다. 그 두 개의 칼자루는 형(刑)과 덕(德)이다. 죽이는 것을 형이라 하고 상을 주는 것을 덕이라 한다." _ 한비자 '이병(二柄)'

한비자는 이 둘을 군주가 절대 신하에게 넘겨서는 안 되는 통치의 최후 수단이라 했다. 인사권과 상벌권은 결국 같은 자리에서 나온다.

이 두 칼자루는 강력하나, 한비자가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 그것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최소한'이라는 사실이다. 강제는 저항하지 않게 하나 헌신하게 하지 못하고, 보상은 움직이게 하나 몰입하게 하지 못한다. 강제와 보상은 사람의 발은 묶을 수 있지만 마음은 묶지 못한다.

백성에게 감자를 먹이는 법

18세기 프로이센의 군주 프리드리히 대왕은 백성에게 감자를 먹이고 싶었다. 거듭된 전쟁과 흉작으로 굶주림이 일상이었던 시절, 척박한 땅에서도 자라고 곡물보다 몇 배의 칼로리를 내는 감자는 백성을 살릴 전략 자원이었다. 왕은 어린 시절 부왕의 명으로 지방을 돌며 농업을 배웠고, 즉위 후에는 궁전 정원에 감자를 손수 길러 관찰했으며, 전쟁 포로들에게 먹여 안전한 식량이 될 수 있음을 직접 확인했다.

왕은 먼저 형(刑)의 칼자루를 들었다. 1756년, 감자 재배를 명령하는 칙령(Kartoffelbefehl)을 내렸다. 평생 그가 발한 감자 칙령은 무려 열다섯 차례에 이른다. 어기는 자에게는 코와 귀를 자르겠다는 위협까지 따랐다. 그러나 백성은 따르지 않았다. 어떤 마을에서는 받은 감자를 그날 밤 모조리 파묻어 버렸고, 어떤 마을에서는 "개도 안 먹는다"는 답장을 왕에게 보냈다. 매를 맞아도 하기 싫은 일이었다.

다음으로 왕은 설득했다. 안내문을 뿌리고, 직접 감자를 먹는 모습을 보였으며, 왕실 식탁에 매끼 올렸다. 백성은 외면했다. 성경에 없는 작물이라는 종교적 의심, 가지과 식물에 대한 독성의 두려움, 나병을 일으킨다는 미신, 그리고 무엇보다 "농부는 모르는 것을 먹지 않는다"는 오랜 속담의 무게가 있었다. 왕의 말은 옳았지만, 그 옳음만으로는 한 사람의 입에도 감자를 넣을 수 없었다.

왕은 한 가지를 깨달았다. 사람이 원하지 않는 것은 강제로도, 설득으로도 안긴다고 받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이 갖고 싶어 하는 것은 막아도 가져간다. 그렇다면 욕망의 방향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

그가 생각해낸 방법은 강제의 정반대였다. 그는 감자를 '왕실의 채소'로 선포했다. 왕실 정원에 감자밭을 만들고 군대를 세워 출입을 금지했다. 그러나 보초병에게는 은밀한 두 지시가 내려졌다. 낮에는 엄격히 지킬 것, 밤에는 눈을 감아줄 것. 막되, 새어나가게 하라. 백성들은 밤마다 몰래 감자를 훔쳐다 자기 밭에 심기 시작했다.

같은 감자, 같은 백성, 그러나 정반대의 행동. 그 사이에 무엇이 끼어들었는가. 세 가지 심리적 변화였다. 첫째, 왕실이 지키는 작물이라는 사실 자체가 가치의 신호가 되었다. 직접 먹는 모습을 보였을 때 통하지 않았던 메시지가, 지키는 모습을 보이자 통했다. 둘째, 같은 행위의 의미가 뒤바뀌었다. 칙령을 따라 심으면 강요된 순종이지만, 훔쳐다 심으면 권력에 대한 작은 거역이자 자기 의지의 행사가 된다. 행위는 같지만 주체가 달라졌다. 셋째, 위험을 무릅쓰고 얻은 것은 더 귀해진다. 거저 받은 감자는 천하지만, 훔쳐 온 감자는 귀하다.

희소성의 힘, 금지의 역설. 흔한 해석은 거기까지다. 그러나 본질은 더 깊다. 프리드리히가 한 일은 감자를 희소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욕망의 주체를 바꾼 것이다. 칙령을 받았을 때 백성은 객체였고, 훔쳤을 때 주체가 되었다. 주체가 된 사람만이 비로소 움직인다.

톰 소여의 담장

마크 트웨인의 톰 소여는 같은 원리를 더 선명하게 보여준다. 이모에게 벌로 페인트칠을 떠맡은 톰은 친구들이 다가오자 그 일이 굉장히 재미있고 영광스러운 일인 것처럼 행동했다. 결국 친구들은 사과를 바치며 페인트칠할 권리를 사 갔다. 톰은 그늘에서 사과를 먹었고, 담장은 세 번이나 새 칠을 입었다.

"사람이든 아이든 무엇을 갈망하게 만들려면, 그것을 얻기 어렵게 만들기만 하면 된다." _ 마크 트웨인 『톰 소여의 모험』

같은 페인트칠이었다. 톰에게는 벌이었고, 친구들에게는 사과를 바쳐서라도 사고 싶은 권리였다. 행위는 같은데 심리는 정반대였다.

노자도 도덕경 17장에서 같은 결을 짚었다. "공이 이루어지고 일이 완수되어도 백성은 '내가 스스로 그리하였다'고 말한다(功成事遂, 百姓皆謂我自然)." 통치자의 존재마저 잊은 채 자신의 의지로 한 일이라 믿게 하는 것이야말로 절정의 다스림이다. 한비자의 이병보다 한 차원 위의 통치다.

보상의 배신

벌이 아닌 상은 어떨까. 상은 사람을 움직인다. 그러나 얼마나 오래 가는가.

1949년, 심리학자 해리 할로우는 8마리의 붉은털원숭이에게 기계적 퍼즐을 주었다. 풀면 음식을 주지도, 풀라는 지시도 없었다. 그저 우리 안에 퍼즐만 두었다. 원숭이들은 자발적으로 몰두했고, 2주가 되기 전에 모두 풀었으며, 3분의 2는 60초 안에 해결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그저 하고 싶어서였다.

할로우는 두 번째 실험에서 보상을 도입했다. 풀면 건포도를 주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보상을 받자 성과가 좋아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빠졌다. 원숭이들은 더 많은 실수를 했고 푸는 빈도도 줄었다. 건포도는 행동을 강화한 것이 아니라 흥미를 잃게 했다.

이것이 '보상의 배신'이다.

22년 후, 에드워드 데시는 사람을 대상으로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소마(Soma) 퍼즐을 즐겨 풀던 학생들을 두 그룹으로 나눠 한쪽에는 풀 때마다 돈을 주고, 다른 쪽에는 주지 않았다. 며칠 후 데시가 자리를 비웠을 때, 누가 시키지 않아도 퍼즐을 계속 푸는 학생은 돈을 받지 않은 그룹이었다. 보상을 받은 학생들은 보상이 사라지자 흥미마저 잃었다.

원숭이의 건포도와 학생의 돈은 같은 것을 빼앗아 갔다. 흥미와 즐거움이다. 보상은 외부에서 오지만 즐거움은 내부에서 우러난다. 외부의 보상이 내부의 즐거움을 대체하기 시작하면, 즐거움은 사라지고 보상에 대한 의존만 남는다. 데시는 이를 '내재적 동기의 약화'라 불렀다.

데시는 인간이 지속적으로 무언가를 원하고 행하게 만드는 동력을 세 가지로 정리했다. 자율성(스스로 선택했다는 감각), 유능감(잘하고 있다는 감각), 관계성(연결되어 있다는 감각). 이 셋이 갖춰지면 사람은 보상 없이도 움직이고, 이 셋이 없으면 아무리 보상해도 멈춘다.

프리드리히의 울타리는 백성에게 자율성을 돌려주었다. 시켜서 심는 것이 아니라 훔쳐서 심는 것이었기에 그것은 백성 자신의 선택이 되었다. 톰의 페인트솔은 친구들에게 유능감을 주었다. 아무나 칠할 수 없다는 신호가 그들을 장인의 자리로 끌어올렸다. 두 일화는 데시의 실험을 직관으로 먼저 알고 있었던 셈이다.

미국의 군 사령관이자 대통령이었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이것을 한 문장으로 정의했다.

"리더십이란, 당신이 원하는 일을 다른 사람이 그것을 하고 싶어서 하게 만드는 기술이다."

전쟁터에서 수십만 명을 움직여본 사람의 결론이다. 명령으로 움직인 군대는 명령이 끊기는 순간 무너지기 때문이다.

양날의 칼

어느 조직에서나 비슷한 방식으로 사람이 움직인다. 명령하는 리더는 한비자의 형(刑)으로 다스리고, 보상하는 리더는 한비자의 덕(德)에 기댄다. 둘 다 이병의 칼자루를 쥔 자들이며, 그것으로 끌어내는 것은 최소한의 성과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리더는 스스로 원하게 하는 리더다. 이병 너머의 한 칼자루를 더 쥔 자다.

원하게 하는 리더는 일의 의미를 설명하기보다 일이 만들어낼 변화를 보여준다. 직원이 스스로 방법을 정하게 두고, 잘하고 있다는 신호를 정확히 주고, 함께 가고 있다는 감각을 잃지 않게 한다. 그의 사람들은 시키지 않아도 움직이고, 그가 자리를 비워도 일은 계속된다. 일을 마치고 나서 그들은 말한다. "내가 해냈다."

그러나 이 기술은 양날이다. 누군가는 이 원리를 이용해 사람들이 자신에게 이로운 것을 스스로 선택하도록 돕고, 누군가는 같은 원리로 사람들이 회사에 이로운 것을 스스로 원하도록 조작한다. 좋은 리더와 능숙한 조작자의 차이는 기법이 아니라 방향에 있다. 끌어낸 욕망이 결국 누구의 것이 되는가, 그것이 갈림길이다. 기술은 같다. 방향이 다를 뿐이다.

두 갈래 질문

사람을 이끄는 자에게 묻는다. 당신은 시키고 있는가, 보상하고 있는가, 아니면 원하게 하고 있는가. 당신의 사람들이 당신을 떠나서도 그 일을 계속할 만큼,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는가. 그리고 당신이 끌어낸 그 욕망은, 결국 누구의 것인가.

스스로 움직이는 자에게 묻는다.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그 일은, 누가 원하게 만든 것인가. 그 야망은 당신 안에서 자라난 것인가, 위에서 심어진 것인가. 당신은 매를 맞으면서도 하기 싫은 일을 하고 있는가, 벌을 받으면서도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는가. 최근 당신이 원했던 것 중, 정말 당신의 이유로 선택한 것은 무엇인가.

이들에 대한 답이 바로 당신의 리더십이며 당신의 정체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