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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과 세상살이/신음어(呻吟語) _여곤(呂坤)

신음어(呻吟語) 해제

by 변리사 허성원 2022. 7. 19.

신음어(呻吟語)

 

1. 개요명말(明末)의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여곤이 지은 《신음어(呻吟語)》는 그가 오랫동안 지방관으로 복무하면서 경험한 치자(治者) 계급의 부패를 바로잡고, 또 백성들의 실질적인 삶에 도움이 되는 다양한 사상과 객언 및 교훈들을 담고 있는 책이다. 그래서 이 책은 고원한 공리공담(空理空談)보다는 실천궁행(實踐躬行)할 수 있는 내용들을 다루고 있어 오늘을 사는 우리 삶에도 적용 가능한 풍부한 자료들을 담고 있다.

2. 저자

(1) 성명:여곤(呂坤)(1536~1618)
(2) 자(字)·별호(別號):자는 숙간(叔簡), 호는 신오(新吾)·심오(心吾)·거위재(去僞齋)·포독거사(抱獨居士)
(3) 출생지역: 영릉(寧陵)(하남성(河南省) 영릉(寧陵))
(4) 주요활동과 생애
여곤은 어릴 때 자질이 노둔(魯鈍)하여 독서를 해도 별반 성과가 없자 일체를 포기하고 마음을 맑게 하여 깨달음[體認]을 얻고자 했는데, 그 결과 오래되자 깨달음을 얻었고 이후에는 보는 것 마다 잃어버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15세에 성리서(性理書)를 읽고 문득 이해하고서는 《야기초(夜氣鈔)》와 《확량심시(擴良心詩)》를 짓기도 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오경(五經)과 사서(四書)를 가까이하며 과거에 응시할 준비를 하여 1571년 36세에 예부시(禮部試)에 급제하고, 3년 후인 1574년에 처음으로 양원현지현(襄垣知縣)이 되었고, 이듬해에 대동현지현(大同縣知縣)(1575)을 거쳐 이부주사(吏部主事)(1578), 이부낭중(吏部郞中), 산동참정(山東參政)(1578), 산서안찰사(山西按察使)(1589), 섬서포정사(陜西布政使)(1591), 순무산서첨도어사(巡撫山西僉都御使)(1592), 형부우시랑(刑部右侍郞) 등을 역임했다.
그는 지방관으로서 민초들과 직접 접할 기회가 많았는데 그 결과 타락할 대로 타락한 벼슬아치들의 횡포를 목도했고 곤고(困苦)한 가운데 신음하는 백성들의 울부짖음을 들었다. 그래서 1579년에 《성심기(省心紀)》를 지어 관리로서 자신의 체질을 개선하여 인심을 바로잡고자 했다. 또 57세 때 관료들을 경계하기 위해 지은 《실정록(實政錄)》도 그의 민생에 대한 고민을 반영한 것이다. 그리고 일찍이 만력(萬曆) 18년(1590)에 그가 협서안찰사로 있을 때, 《열녀전(列女傳)》을 읽고 그 중에서 표본이 될 만한 여성 117명을 뽑아 《규범도설(閨範圖說)》을 지었는데, 마침 이 책이 태감(太監)인 진구(陳矩)의 눈에 띄어 신종황제에게 알려졌다. 황제는 그것을 보고는 자못 기뻐하여 총애하는 정귀비(鄭貴妃)에게 선물로 주었는데, 정귀비는 거기다가 또 서문을 붙여 다시 출판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황태자 옹립문제와 얽히면서 혹독한 곤혹을 치루게 된다. 여곤이 정귀비에게 영합하여 은밀히 정귀비의 아들 상순(常洵)을 황태자로 옹립하고자 한다는 비난이 일었던 것이다. 이러한 문제가 뒤얽힌 가운데 62세 때인 만력 25년(1597)에 여곤은 국가의 앞날을 근심한 나머지 장문의 상소를 올렸는데, 그것이 그 유명한 〈우위소(憂危疏)〉이다. 그런데 이러한 여곤의 상소는 받아들여지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빌미로 모함하는 자들이 생겼는데, 이에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그가 죽기 전까지 20여 년간 후진을 양성하면서 저술에 힘썼다.
(5) 주요저작: 《사례의(四禮疑)》, 《사례익(四禮翼)》, 《교태운(交泰韻)》, 《규범(閨範)》, 《실정록(實政錄)》, 《음부경주(陰符經注)》, 《신음어적(呻吟語摘)》, 《소궤어(小几語)》, 《무여(無如)》, 《거위재문집(去僞齋文集)》 등

3. 서지사항

《신음어》는 여곤이 30여 년의 긴 기간 동안 심혈을 기울여 만든 책으로 1593년 만력 21년에 출판되었다. 모두 6권으로 예집(禮集), 악집(樂集), 사집(射集), 어집(御集), 서집(書集), 수집(數集) 순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앞의 3권은 내편(內篇)이고 뒤의 3권은 외편(外篇)이다. 내편에 속한 권1 예집에는 〈성명(性命)〉·〈존심(存心)〉·〈윤리(倫理)〉·〈담도(談道)〉라는 4편의 글이, 권2 악집에는 〈수신(修身)〉·〈문학(問學)〉이라는 2편의 글이, 권3 사집에는 〈응무(應務)〉·〈양생(養生)〉이라는 2편의 글이 실려 있다. 그리고 외편에 속한 권4 어집에는 〈천지(天地)〉·〈세운(世運)〉·〈성현(聖賢)〉·〈품조(品藻)〉라는 4편의 글이, 권5 서집에는 〈치도(治道)〉라는 1편의 글이, 권6 수집에는 〈人情인정〉·〈물리(物理)〉·〈광유(廣喩)〉·〈사장(詞章)〉이라는 4편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만력 21년에 처음 출판되었지만 교정이 부정확하여 여곤 자신이 첨삭을 가하기도 하고 원고를 바꾸기도 하여 만력 44년에 다시 출판되기도 했다.

4. 내용

《신음어》는 여곤의 철학사상 및 그의 인생에 대한 사고와 탐색을 풍부하게 반영하고 있다. 이 중에는 특히 그가 추구한 중심사상이 체현되어 있는데, 송명이학자들이 ‘도(道)’와 ‘기(器)’, ‘이(理)’와 ‘기(氣)’를 분리하여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그는 ‘기일원론(氣一元論)’적 철학사상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즉 “천지만물은 다만 일기(一氣)의 모이고 흩어짐일 뿐이다.[天地萬物只是一氣聚散]”(〈천지(天地)〉)라는 그의 주장이 이에 해당한다. 또 중국전통의 ‘음양징응설(陰陽徵應說)’과 불교의 ‘윤회설(輪回說)’에 반대하면서 사물이 변화·발전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하며 우연한 규율이라 본 것도 그의 사상의 한 측면이다.
또 인성론에서도 선과 악이 모두 사람의 본성이라고 생각하여 “의리(義理)의 성(性)에는 선(善)만 있고 악(惡)은 없다. [그러나] 기질(氣質)의 성(性)에는 선도 있고 악도 있으니, 기질도 역시 하늘이 사람에게 명하여 생(生)과 더불어 함께 생(生)한 것인데, 그것을 성(性)이라 하지 않으면 되겠는가.[義理之性, 有善无惡;氣質之性, 有善有惡. 氣質亦天命于人而與生俱生者, 不謂之性可乎?]”(〈性命〉)라고 하였다. 또 ‘양지양능설(良知良能說)’을 반대하고 사물에 나아가 이치를 탐구하는 ‘학지(學知)’를 강조했다. 그리고 특히 당시의 부패한 귀자(貴者)와 현자(賢者)의 수양을 강조하면서 주희와 왕양명의 치우침을 보충하기 위해 도문학(道問學)과 존덕성(尊德性)의 균형을 강조하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주장들은 그가 다년간 지방관으로 복무하면서 공리공담이 백성의 실질적인 삶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음을 목도하면서 내놓은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신음어》에는 백성의 실질적인 삶이라는 관점에서 그의 인생경험의 총결 혹은 그가 삶에서 심사숙고한 수많은 격언들이 담겨 있다. 우리가 이 책에서 인생에 대한 다양한 관점과 처세방법을 배울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음미하면 음미할수록 독자의 마음과 안목을 더 넓게 열어주는 맛이 풍부하게 우러나는 것도 이 책이 가진 바로 이러한 측면 때문이다.

5. 가치와 영향

오늘날 《신음어》는 홍자성(洪自誠)의 《채근담(菜根譚)》과 함께 지혜의 보고라 여겨져 많은 사람들이 읽는 책이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은 여곤이 오랫동안 지방관으로 재직하면서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30년 동안 심사숙고하여 적은 책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문집에도 이 책에 대한 언급이 보이는데 이유원(李裕元)의 《임하필기(林下筆記)》나 조긍섭(曺兢燮)의 《암서집(巖棲集)》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이 책은 오늘날의 중국이나 한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많이 읽히는 고전이 되었는데, 한국에서 이 책에 대한 번역본이 약 6종류 있고, 일본에서는 번역본뿐만 아니라 이 책을 지혜의 보고라 보고 이 책을 저본으로 새롭게 현실에 맞게 재구성한 경우도 보인다. 바로 이러한 사실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이 책이 유의미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6. 참고사항

(1) 명언
• “사군자는 단지 네 가지 진실을 추구해야 한다. 곧 진실된 마음과 진실된 입 및 진실된 귀와 진실된 눈이 〈그것이다.〉 진실된 마음은 망념(妄念)이 없는 것이고, 진실된 입은 잡박한 말이 없는 것이며, 진실된 귀는 간사한 들음이 없고, 진실된 눈은 잘못 식별하는 것이 없다.[士君子只求四眞 眞心眞口眞耳眞眼 眞心無妄念 眞口無雜語 眞耳無邪聞 眞眼無錯識]” 〈수신(修身)〉
• “온 세상이 모두 내 마음이다. 이 나의 〈이기적〉 마음[我心]을 제거하면 곧 〈모든 것이〉 사통팔달하게 되고 동·서·남·북·상·하가 조금의 한계도 없게 된다. 나의 〈이기적〉 마음을 제거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시각각 이 생각(마음)이 천지만물을 위하는 것인지 나〈의 이기심〉을 위한 것인지 반성하고 검사해야 한다.[擧世都是我心 去了這我心 便是四通八達 六合內無一些界限 要去我心 須要時時省察這念頭是爲天地萬物 是爲我]” 〈존심(存心)〉
“세 사람(공자(孔子)·노자(老子)·석가(釋家))이 전한 마음[心]의 요법(要法)을 총괄하면 하나의 〈고요할〉 ‘정(靜)’ 자(字)를 벗어나지 않고, 그 시작하는 곳[下手處]은 모두 욕망의 절제(制欲)이고, 최종 목적지[歸宿處]는 모두 다 욕망이 없는 것[無欲]이다. 이것이 바로 〈세 사람이〉 동일한 점이다.[三氏傳心要法 總之不離一靜字 下手處皆是制欲 歸宿處都是無欲 是則同]” 〈담도(談道)〉
(2) 색인어:여곤(呂坤), 신음어(呻吟語), 기일원론(氣一元論), 수양론(修養論), 인성론(人性論), 학지(學知), 격언(格言), 교훈(敎訓)
(3) 참고문헌
• (국가를 경영하는 요체) 신음어(呂坤 著, 김재성 解譯, 자유문고)
• (新譯) 呻吟語(呂坤 著, 안길환 編譯, 명문당)
• 신음어(呂坤 지음, 柳斗永 編譯, 자유문고)
• 신음어:공직자들의 지침서(이준영, 자유문고)
• 세상을 보는 지혜:呻吟語(後篇)(뤼신우 著, 박인용 譯, 아침나라)
• 냉철한 자기성찰 그리고 인생에 필요한 지혜(呂坤 著, 朴勝燮 譯, 삼익미디어)
【박동인】

출처 : 동양고전해제집(東洋古典解題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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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음어(呻吟語)

한 국가를 경영하는 요체를 밝힌 책. 인간의 마음, 인간의 도리, 도를 논하는 방법, 국가 공복의 의무, 세상의 운세 그리고 성인과 현인, 국가를 경영하는 요체 등의 주제로 나뉘어 있다.

신음어(呻吟語)란 어떤 책인가?
『신음어』는 중국 명(明)나라의 관리인 여곤(呂坤)이 지은 것으로 출간이후 줄곧 중국 관리들의 지침서로 일컬어진 명저이다.
여곤(1536∼1618)은 명나라 가정(嘉靖: 世宗의 연호) 15년의 학자로서, 자는 숙간(叔簡), 호는 신오(新吾), 하남 영릉(河南寧陵) 사람이다.
그는 이른바 준재(俊才)라고는 할 수 없고, 어린 시절에는 독서력도 별로 신통치 않았다. 15세 때에 성리학(性理學)의 여러 책을 읽고 크게 마음이 움직이는 바가 있어, 그로부터 오경(五經)과 사서(史書)를 가까이 하고 자신이 수양한 것을 거울로 삼음과 동시에 과거시(科擧試)의 준비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는 융경(隆慶: 명나라 목종) 5년 36세 때에 예부시(禮部試)에 합격하였고, 39세에 처음으로 임관(任官)되어 산서성(山西省) 양원현(襄垣縣)의 영(令: 지금의 군수)이 되었다.
다음 해에 같은 성(省) 대동현(大同縣)의 영으로 전근되어 고루 지방 행정의 말단에서 민생의 곤고(困苦)함과 관계(官界)의 타락을 목격하였다.
그것은 그가 경시나 사서 등을 통해 머릿속에 그려 온 중국의 이상적인 사회와는 너무도 큰 거리를 가지는 것이었다. 고지식하게 관료로서의 책무를 다하고자 한 그는 그것을 가로막는 관계의 무책임한 풍조에 반발함과 동시에 인심을 바로잡아야겠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스스로의 품성을 연마하는 것이 선결 문제라 생각하고, 스스로의 체질을 개선하기 위해 구체적인 수양의 수단으로 생각해 낸 것이 『성심기(省心紀)』의 저술이었다. 만력(萬曆: 명나라 신종) 8년, 그의 나이 44세 때의 일이다.

『성심기』란 자기의 나날의 과오(過誤)를 기록하여 반성의 자료로 삼는 것이었으나,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을 언제나 각성(覺醒)시킬 필요가 있는 것이므로 그렇게 이름 붙인 것이다. 거기에는 심과류(心過類) 37조, 신과류(身過類) 53조, 구과류(口過類) 50조가 보인다.

그는 만력 6년인 43세 때에 중앙으로 돌아와 이부주사(吏部主事)에 취임했다. 그 후 상서랑(尙書郞)에까지 승진했는데, 52세 때에 다시 산동제남도참정(山東濟南道參政)이라는 관직을 맡고 다시 지방에 근무하게 되었고, 2년 뒤에는 산서안찰사(山西按擦使), 다시 2년 뒤에는 섬서포정사(陝西布政使)에 임명되었으며, 만력 20년인 57세가 되어서는 순무산서첨도어사(巡撫山西僉都御使)가 되었다.

이와 같이 다년간 정치 실무에 종사한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관료의 마음의 자세를 정리한 것이 그의 나이 57세 때에 완성된 『여공실정록(呂公實政綠)』이다. 이것은 명대(明代)에 있어서 관리를 경계하는 대표적인 저서로서 후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가 이 책을 집필한 동기는 관료의 횡포에 시달리는 일반 백성의 도탄(塗炭)의 괴로움에 대한 동정이었으리라. 관료는 격렬한 시험 경쟁을 거쳐서 서민보다 상위에 있는 특권 계급이다.

그러나 관료의 본래의 임무는 천자의 의탁을 받아 민생의 안정과 국가 이익의 증진을 꾀하는 데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영달을 위하여 뇌물을 아끼지 않고 동료를 중상하며 매명(賣名)과 이득을 얻기에 광분하고 있다. 또 가렴주구(苛斂誅求)의 학정을 행하여 백성은 극도의 빈곤을 강요당했다. 그것은 정직하게 말하여 백성을 인간으로 다루지 않고, 백성에게서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박탈하여 동물과 같은 생활 수준으로 몰아넣은 결과가 된 것이다.

이러한 관료의 타락을 개탄한 여곤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아, 정학(正學)은 쇠퇴하고 인도(人道)는 끊어져, 영달(榮達)을 동경하는 풍습이 유행하고 남의 괴로움을 동정하는 진심이 실추되었으니, 살아 갈 방도가 없어진 백성은 누구에게 의지해야 할 것인가. 관료들은 누구나 부귀를 탐내고, 인도는 퇴폐하였으며, 백성은 탄식한다. 이 앞날은 장차 어찌 될 것인가. 생각할수록 통곡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다. 하늘이 관료를 낸 것은 결코 주육(酒肉)을 담는 부대나 비단을 거는 옷걸이로 만든 것은 아니다. 하늘이 백성을 낸 것은 결코 관료를 위한 어육(魚肉)이나 정부의 창고로 만든 것은 아니다. 반성할수록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다. (實政綠 卷一)”

그리고 그는 관료들에게 되풀이하여 마음의 순화와 백성을 애호할 것을 호소하였다. 관료가 이러한 상태라면, 인간의 대우를 받지 못하는 일반 백성에게 도의심이 희박할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교양이 없는 서민에게 선악의 분별을 가르치는 데에는 독서인(讀書人)계층과는 다른 방법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리석은 백성이나 가난한 백성에게는 갑자기 성현(聖賢)의 도를 권장할 것이 아니다. 그들의 삐뚤어진 마음을 바로잡아 주려면 자로 재듯이 하는 법령으로서는 안 될 것이니, 법령 이외의 배려가 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여곤은 말하였다.
그 법령 이외의 방법으로서 그가 고안한 것은 각 향촌(鄕村)에 ‘기선부(紀善簿)’와 ‘기악부(紀惡簿)’를 비치하여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하는 방법이다.

여곤이 활약하던 시기에 있어서 하나의 정치·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어 있었던 것은, 향촌 사회의 윤리 의식을 높이고 그 풍속을 바로잡아 관과 민의 융화를 확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관리의 억압에 견디지 못하여 각지에서 농민 폭동이 이어서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생활의 곤란이 더하여 농민의 인간적 자각이 높아지기 시작했다고 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한 형편에서 향촌의 교화는 치안을 유지하는 것 이상의 급무가 된 것인데, 그 기본 요령으로 생긴 것이 ‘향약(鄕約)’이다. 여곤은 예의 『성심기』와 같은 감각을 지니고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의 선악의식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는 ‘향약’ 속에 ‘기선부’와 ‘기악부’의 규정을 덧붙여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백성의 동향을 관청에서 확실히 장악하여 악한 짓을 되도록 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여곤은 만력 20년 57세 되던 해에 다시 중앙으로 돌아와 도찰원좌첨도어사협리원사(都察院左僉都御史協理院事)에서 승진하여 형부좌시랑(刑部左侍郞)이 되었다. 이때는 전과 비교하여 관계의 풍조가 한층 더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는데, 뜻하지 않게 그 자신이 정쟁(政爭)에 휘말려 들어가는 큰 사건이 터졌다. 이보다 앞서 만력 18년에 여곤이 산서관찰사로 있을 때 『열녀전(烈女傳)』을 읽고, 그 중에서 표본이 될 만한 여성 117명을 뽑아 한 책으로 엮어 『규범(閨範)』이라 이름 붙여서 간행하였다. 그것이 호평을 받아 각 지방에서도 출판되어 규문(閨門)의 지보(至寶)라고까지 일컬어졌다.
이 책이 태감(太監)인 진구(陳矩)의 눈에 띄어 신종황제(神宗皇帝)에게까지 알려졌고, 황제는 그것을 총애하는 정귀비(鄭貴妃)에게 주었는데, 정귀비는 거기다가 서문을 붙여 다시 출판하였다.
때마침 궁중에서는 황태자 옹립 문제를 둘러싸고 치열한 암투가 벌어져 공비 왕씨(恭妃王氏)가 낳은 장자인 상락(常洛)과 정귀비를 생모로 하는 상순(常洵) 중 누구에게로 돌아가느냐 하는 것이 정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었다.
그런데 『규범』 중 부인지도(婦人之道) 첫머리에 후한(後漢) 명제(明帝)의 황후로서 재덕(才德)이 뛰어난 마황후(馬皇后)가 실려 있는데, 정귀비가 이 책 출판에 힘쓴 것이 마치 자기가 마황후에 비길 만한 인물임을 내세우기 위한 것이라는 의심을 받기에 이르렀고, 여곤에 대하여도 정귀비에게 영합하여 은밀히 상순을 황태자로 옹립하고자 한다는 비난이 일었다.
비난에 앞장을 선 것은 일찍이 여곤 일파를 좋지 않게 여겨 오던 사람들로서, 그들은 여선생이 이 책을 만든 것을 황태자 문제에 대한 야심은 없었다 하더라도, 불행하게도 그 흔적이 보인다고 하였다. 이에 사건의 중대화를 근심한 여곤은 황제에게 변명하는 상소를 올리고 처분을 모면하였으나, 관계의 악폐(惡弊)를 절실하게 느낀 사건이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이러한 문제가 뒤얽힌 가운데 62세 때인 만력 25년에 여곤은 국가의 앞날을 근심한 나머지 장문의 상소를 올렸는데, 그것이 ‘우위소(憂危疏)’다. 상소문의 내용은 이렇다.

“하늘에도 땅에도 변란(變亂)의 조짐이 있고, 가지가지 형태의 난민(亂民)이 봉기할 기색이 있다. 그것은 모두 백성의 빈곤으로 말미암은 것인데도 불구하고 만력 10년 이래로 매년 흉년이 계속되건만 조세를 거두어들임은 도리어 가혹해지고 있다. 자신의 오랜 세월에 걸친 지방관의 체험으로 볼 때, 백성은 뼈에 사무치는 추위 속에서도 입을 것과 먹을 것이 없어서 도망치는 자가 날로 많아지고 묵는 땅이 늘어만 간다. 남아 있는 자는 도망간 자의 몫까지 조세를 바치지 않으면 안 되고, 생존자는 죽은 자의 몫까지 노역에 종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건만 천자는 멀리 있으므로 호소할 길이 없다. 현재 국가의 재정은 파탄에 가까운 상태다.
궁전의 영조비(營造費), 영하사변(寧夏事變)의 군사비, 황하 결괴(黃河決潰)의 대책비, 큰 공사를 위한 벌채비(伐採費) 등 몇 백량(兩)을 필요로 하건만, 국토는 확대될 리 없고, 백성이 증가할 리 없으므로, 이러한 경비를 염출할 방법은 전혀 없다.
다음으로 국가의 방위태세는 참으로 형편이 없다. 세 개의 큰 영문이 도읍을 지키고는 있으나, 말은 거의 지쳐 있고, 병사는 거의 노약자(老弱者)다. 국경에 있는 군대는 외적의 침입을 막는 것을 사명으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적을 두려워한다. 병사는 민간에서 징발되는데, 장정의 적격자는 점차 줄어들고 피골(皮骨)이 상접(相接)한 자들만이 남아 있을 뿐이어서 일단 사건이 터졌을 때는 아무 쓸모도 없는 존재들이다. 이런 형편이니 전투의 의욕이 있을 리 없다.”

이와 같이 여러 면의 문제를 언급하면서 가렴주구(苛斂誅求)의 실태를 세세히 설명하고는 황제의 반성을 촉구하고, 그 의심과 노심(怒心)을 지적하였다. 여곤으로서는 목숨을 건 상소문이었으나 받아들여지기는커녕 그것을 트집 잡아 공격하는 자까지 나타난 것이다. 이에 절망한 여곤은 드디어 관직을 내놓고 그 고향으로 돌아갔다.

고향으로 돌아온 여곤은 오로지 후진의 지도와 저술에 여생을 바치다가 만력 46년에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유족으로는 2남 2녀가 있었는데, 지외(知畏)와 지사(知思)의 두 아들은 『신음어(呻吟語)』의 교정과 출판에 진력하였는데, 지외는 그 발문(跋文)도 썼다.

『신음어(呻吟語)』는 여곤(呂坤)이 정치적인 그리고 경제적인 여러 문제로부터 일상으로 흔히 있는 모든 문제에 이르기까지의 우려(憂慮)·분만·내성(內省)·위구(危懼)·대책(對策)·신념(信念) 등을 솔직하게 피력한 것으로서, 단편적인 이야기가 집적된 것이면서도 저자의 인품이 여실히 배어 나온다고 하겠다. 그 집필의 동기는 저자의 서문에 보면 이러하다.

“신음이란 병자의 앓는 소리다. 신음어란 병이 들었을 때의 아파하는 말이다. 병중의 아픔은 병자만이 알고 남은 몰라준다. 그 아픔은 병들었을 때에만 느끼고 병이 나으면 곧 잊어버린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약질(弱質)이어서 병에 잘 걸렸다. 앓고 있을 때 앓는 소리를 하게 되면, 그 괴로움을 기록하여 후회하고 조심하면 다시는 병에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조심을 하지 않기 때문에 다시 병에 걸리고, 또 그 괴로움을 겪는다.”

이와 같이 앓고는 쓰고, 쓰고는 앓기를 30년에 미친다고 하는 것이나, 여기서 말하는 병이라는 것은 육체적인 병이라기보다는 정신적인 것이라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다만 이 책을 한번 읽고 감지(感知)되는 것은 신음하는 말이라고 이름을 붙이면서도 한 구절 한 구절에서 끊어지는 일이 없이 지극히 자신에 찬 논조가 전 편을 꿰뚫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그가 고민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 아니고 고민 끝에 깨달은 결론을 그때그때 단숨에 써 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 중에는 크게 괴로워할 것도 없이 그의 평소의 신념에서 직관적으로 떠오른 이야기 그대로인 것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의 벗의 권고에 의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실은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바를 감추어 두지 않고 널리 세상에 펴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런 의미에서 ‘신음어’는 일종의 세상을 깨우치는 ‘경세어(警世語)’라 일컬어도 좋을 것이다.

여곤의 장남인 지외(知畏)의 발문(跋文)에 의하면, 이 책은 50여 년에 걸쳐 기록한 것으로서, 집안에 있을 때는 물론, 관청에서 바쁘게 일하면서, 또는 말을 타고 먼 길을 갈 때나, 병상에 누웠을 때, 그리고 자다가도 갑자기 눈을 떴을 때 무엇인가 느끼는 것이 있으면 곧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

이 책이 처음으로 간행된 것은 만력(萬曆) 21년이었던 것 같으나, 얼마 되지 않고 호평을 받아 각지에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출판이 행하여졌다.
그러나 내용의 선택이 불충분하기도 하고, 교정이 부정확하기도 해서, 여곤 자신이 첨삭(添削)을 가하기도 하고, 원고를 바꾸기도 하고, 약간의 속편(續編)을 더하기도 하여, 만력 44년에 『신음어적(呻吟語摘)』이라고 제(題)하여 간행하였다.

그 내용은 내외(內外) 2편에 6권으로 되어 있다. 6권은 예·악·사·어·서·수(藝·樂·射·御·書·數)의 6집(六集)인데, 내편에서 예집(藝集)은 성명(性命)·존심(存心)·윤리(倫理)·담도(談道)로 나누어졌다. 악집(樂集)은 수신(修身)·문학(問學)이며, 사집(射集)은 응무(應務)·양생(養生)으로 분류, 총 3권으로 이루어졌다. 또 외편에서 어집(御集)은 천지(天地)·세운(世運)·성현(聖賢)·품조(品藻)이며, 서집(書集)은 치도(治道)의 한 부분으로 되었으며 수집(數集)은 인정(人情)·물리(物理)·광유(廣喩)·사장(詞章)으로 구분하고 3권으로 이루어 졌다.

출전 / 자유문고 고전에서 배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