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진문공(晉文公)과 한고조(漢高祖)의 논공행상(論功行賞)

by 변리사 허성원 2018. 2. 25.

'논공행상(論功行賞)'은 말 그대로 공을 논하여 상을 시행한다는 말이다. 군주가 신하들의 공로를 평가하여 그에 걸맞는 상을 내리는 절차로서, 전쟁, 정변 등으로 나라가 큰 이익을 취하거나 권력을 차지하였을 때 공신들에게 베푸는 권력자의 행위이다.

적절한 논공행상은 권력자에게 있어 권력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데 매우 중요하고도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이것이 공정하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군신간의 신뢰가 무너지고 나라의 근간이 흔들리고 분란이 일어날 수 있는 매우 조심스런 일이다. 그래서 논공행상에는 군주의 철학에 따른 엄격한 원칙이 반영되어야 한다. 기업의 상벌 원칙도 그러할 것이다.

논공행상에 관하여 진문공(晉文公)과 한고조(祖)의 가르침을 주는 고사를 소개한다.


1. 진문공(晉文公)의 논공행상




제환공(齊桓公)에 이어 춘추시대 두 번째로 패업(霸業)을 달성하는 진문공(晉文公)은 임금에 즉위하기까지 무려 19년 동안 고된 망명의 유랑생활을 지냈다. 진나라의 임금으로 즉위한 후 망명을 수행한 공신들을 위한 공신록을 발표하면서, 공신록에 빠진 사람은 스스로 고하게 하였다.


그러자 하급 관리 호숙(壺叔)이 문공의 알현을 청하여 말했다.

​"신은 포 땅에서부터 주공을 따라 발꿈치가 부르트도록 천하를 뛰어 다녔습니다. 머무를 때는 침식을 수발하고 길을 떠나면 거마를 점검하며 잠시도 주공의 곁을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지금 주공께서 망명을 수행한 사람들에게 포상을 하시면서 저에게만 내리시지 않으시니, 혹시 신에게 무슨 죄가 있어서 입니까?"

문공이 대답했다.

"그대는 이리 가까이 오라. 과인이 그것을 분명히 알려주리라. 무릇 나를 인의(仁義)로써 이끌어 나의 마음을 넓게 열어준 사람(肺俯開通者)에게 가장 높은 상을 내렸다. 나를 지모(智謀)로서 보좌하여 나로 하여금 여러 제후들에게 욕되지 않게 해준 사람(不辱諸侯者)에게는 그 다음 상을 주었다.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칼날을 막으며 온몸으로 나를 보호한 사람(以身衛寡人者)에게는 또 그 다음의 상을 내렸다.

따라서, 가장 높은 상은 그의 인덕에 포상한 것이며, 다음 상은 그의 지혜에 포상한 것이고, 또 그 다음의 상은 그의 공로에 포상한 것이다. 나와 천하를 돌아다닌 발품의 노력은 필부의 힘을 쓴 것에 불과하므로, 그 다음 순위에 해당하니, 세 가지 상을 모두 시행한 후에 네게도 상이 돌아갈 것이다."

호숙은 부끄러이 여기며 승복하여 물러났다. 


小臣壺叔進曰:「臣自蒲城相從主公,奔走四方,足踵俱裂。居則侍寢食,出則戒車馬,未嘗頃刻離左右也。今主公行從亡之賞,而不及於臣,意者臣有罪乎?」

文公曰:「汝來前,寡人為汝明之。夫導我以仁義,使我肺俯開通者,此受上賞;輔我以謀議,使我不辱諸侯者,此受次賞;冒矢石,犯鋒鏑,以身衛寡人者,此復受次賞。故上賞賞德,其次賞才,又其次賞功。若夫奔走之勞,匹夫之力,又在其次。三賞之後,行且及汝矣。」 壺叔愧服而退. _ <東周列國志/第037回>

* 진문공은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사람를 3등급의 공신으로 대우했다.
지혜를 제공한 사람을 그 다음 높게, 그에게 인
덕(仁德)을 가르쳐준 사람을 가장 높이 평가하고 있다.
여러분이라면 어떤 순위를 매겼겠는가? 아마도 통념적인 판단에 따른다면 순위가 그 반대로 되지 않았을까?

기업의 상황에 맞춰 생각해보자. 인덕은 기업의 철학 즉 비전, 지혜는 핵심 기술역량, 공로는 영업과 생산으로 대입해볼 수 있겠다. 이들 세 분야는 모두 중요하지만, 진문공의 가르침으로 중요도의 줄을 세운다면, 기업의 존재이유(비전)를 정립하고 이를 확신시키는 역할이 가장 중요하고, 그 비전에 기초하여 생존역량이자 경쟁력을 구축하는 역할이 그 다음이며, 많이 만들고 많이 팔아 기업을 성장시키는 역할이 그 다음으로 중요하다 할 것이다.



2. 한고조 유방((祖 )

초패왕 항우와의 쟁패에서 승리하여 중원의 주인이 된 한고조 유방도 논공행상을 벌였다. 그런데 군신들이 서로 공을 다투느라 해를 넘기도록 공을 정하지 못하였다.

결국 한고조는 소하의 공이 가장 많다고 여겨 찬후()로 봉하니 주어진 식읍도 가장 많았다.

이에 대해 공신들은 모두 말하기를,
“신들은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든 채 많게는 100번이 넘게 적어도 수십 번 전투를 치르며 크고 작은 차이는 있지만 모두 성과 땅을 공략했습니다. 지금 소하는 말이 땀을 흘리는 노고도 없이 그저 글로써 이러쿵저러쿵했을 뿐입니다. 싸우지도 않았는데 오히려 신들보다 윗자리를 차지하니 왜 그렇습니까?”라고 했다.

한고조가 “그대들이 사냥에 대해서는 알겠지?”라고 묻자 “알지요.”라고 했다. “사냥개도 알지?”라고 하자 “알지요.”라고 했다. 한고조는 이렇게 말했다. “사냥에서 짐승이나 토끼 따위를 뒤쫓아 죽이는 것은 사냥개다. 그러나 사냥개를 풀어 짐승이 있는 곳을 지시하는 것은 사람이다. 지금 그대들은 그저 짐승을 뒤쫓았을 뿐이니 사냥개의 공을 세운 것이다. 그러나 소하는 사냥개를 풀어 사냥물을 쫒도록 지시했으니 사람의 공을 세운 것이다. 그리고 그대들은 혼자의 몸으로 나를 따랐거나 많아야 두 세 사람이었지만 소하는 집안사람 수십 명을 모두 내게 딸려 보냈으니 그 공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신하들 모두가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_ <史記 家>


 '사냥개의 공'과 '사냥꾼의 공', 정말 기가 막힌 논리이다.
유방의 이 논리에 불만을 가졌던 
군신들은 어떤 반박도 못하였을 것이다. '사냥개'는 사냥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그러니 사냥을 지휘 기획하고 운영한 사냥꾼이 사냥개보다 더 큰 공을 차지하는 것은 당연하다.
통상 '사냥개의 공'이 더 화려하게 드러나 보인다. 그래서 많은 경우 '사람의 공'은 가벼이 다루어지고, 그로 인해 기업의 핵심 인력이 떠나게 되는 경우가 많다.



** 자주(介子推)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