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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토피카

[허성원 변리사 칼럼]#191 개밥그릇과 사자 꿈

by 변리사 허성원 2025. 3. 30.

개밥그릇과 사자 꿈

 

한 고고학자가 만리장성 인근의 시골을 여행하다 한 시골집 앞을 지나는데 강아지가 개밥을 먹고 있다. 그런데 그 개밥그릇은 아무리 보아도 고대의 골동품임에 틀림이 없다. 필경 주인이 무지하여 저 귀한 골동품의 가치를 몰라보고 저렇게 천대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렇다고 불쑥 개밥그릇을 팔라고 하면, 주인은 그제야 개밥그릇의 진짜 가치를 의심하고 경계할 것이니 일을 그르칠지 모른다.

그래서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일단 그 강아지를 팔라고 한다. 강아지를 사고 나서 개밥그릇을 슬쩍 끼워달라고 한다면 필시 거절하지는 않을 것이다. 주인을 찾아 말했다. "정말 훌륭한 품종의 강아지로군요. 이 강아지를 꼭 사고 싶습니다." 주인은 선선히 동의하면서도, 잡종 강아지의 가격으로서는 터무니없이 비싸게 부른다. 그럼에도 개밥그릇의 가치를 염두에 두니 그 놀랄 만한 가격도 감수할 만하다.

강아지 값을 치르고는 주인에게 정중하게 부탁했다. "이 강아지를 위한 적당한 개밥그릇을 당장 구할 수 없어 그러는데, 지금 쓰고 있는 저 개밥그릇을 함께 끼워줄 수 있겠지요?' 그런데 주인의 답이 가관이다. "그건 안 됩니다. 이 개밥그릇으로 그 동안 강아지를 얼마나 많이 팔았는데요. 그것도 10배나 비싼 값으로 말이죠. 이 개밥그릇은 강아지를 많이 팔수 있게 해준 우리 집안의 보물이니 절대로 끼워줄 수 없습니다."

이 이야기는 SNS 어딘가에서 본 유머다. '뛰는 놈 위의 나는 놈'을 가르치는 반전에 이 유머의 펀치라인이 있다. 골동품 개밥그릇을 공짜로 얻으려고 잡종 강아지를 칭송하며 비싼 가격에 산 아이디어는, 자신의 진정한 욕구는 숨기고 상대의 드러난 욕구를 충족시켜주겠다는 우회 접근 방법이니 협상학적으로도 매우 훌륭한 전략이다. 그런데 비극은 안타깝게도 강아지 주인이 한 수 위라는 데 있다. 약은 강아지 주인은 개밥그릇을 미끼로 톡톡히 수지맞는 비즈니스를 즐기고 있었다.

이와 유사한 이야기는 문학작품들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우선 김유정의 단편소설 '봄봄'이 떠오른다. 소설 속의 주인공인 '나'는 점순이 집에 데릴사위로 들어가서 3년이 훌쩍 넘도록 머슴살이를 하고 있다. 장인은 점순이의 키가 덜 자랐다는 핑계로 혼인을 미루며 '나'의 노동력을 착취한다. '나' 이전에도 점순이 데릴사위로 들어왔다 머슴질에 지쳐서 달아난 이들이 두엇 더 있었고, 점순이의 언니 때는 그런 이가 무려 열넷이나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나'와 '장인'은 각각 고고학자와 강아지 주인에 대응한다. '나'는 '점순이와의 결혼'이라는 '개밥그릇' 미끼에 걸려 '머슴살이'라는 비싼 '강아지 값'을 꾸역꾸역 희생하고 있는 것이다.

헤밍웨이의 유명한 소설 '노인과 바다'도 같은 주제다. 쿠바의 늙은 어부 산티아고는 84일 동안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다. 그의 유일한 친구이자 조수인 마놀린도 부모의 등살에 떠나버렸다. 산티아고는 포기하지 않고 홀로 출항한다. 거대한 청새치를 낚아 여러 날 사투를 벌이며 겨우 작살로 잡았다. 너무 커서 배에 묶어 돌아오는데, 피냄새를 맡은 상어 떼의 공격을 받아 청새치의 살은 모두 뜯어 먹히고 뼈만 남는다. 산티아고는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와 쓰러져 잠들고, 사람들은 그가 잡은 물고기의 거대한 뼈를 보고 경외감을 느낀다. 노인에게 남은 것은 지친 몸과 지독한 외로움뿐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의 삶이란 게 원래 그러하다. 누구나 제 나름의 '개밥그릇'을 쫓는다. 그건 봄봄의 '나'에겐 '점순이와의 혼인'이고 산티아고 노인에겐 '청새치'였다. 사람에 따라서는 승진, 성공, 명예, 행복, 평화 등과 같은 것을 '개밥그릇'으로 삼고, 그것을 갈망하여 제 각기 나름의 '강아지 값'을 지불하며 살아간다. 저렴한 노력과 비용으로 값비싼 개밥그릇을 쉽게 보상받는 운 좋은 이도 있겠지만, 결과가 기대를 배신하는 경우가 많다.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만리장성의 강아지 주인이나 '봄봄' 속의 장인 혹은 가혹한 산티아고의 바다가 온 세상에 널려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시도와 도전과 노력을 멈출 수 없다. 설사 속거나 기대에 반해서 가슴과 땅을 치게 될지언정 그나마 '강아지 값'을 치루지 않고서는 원하는 '개밥그릇'을 요구해볼 기회조차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헤밍웨이는 산티아고 노인의 입을 빌려 말한다. "인간은 파멸 당할 수는 있어도 패배 당하지는 않는다." 설사 파멸이 닥치더라도 그것을 패배로 굴복하여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파멸은 가진 것을 몽땅 잃거나 혼신의 노력으로 얻으려던 것을 얻지 못한 실패를 가리킨다. 그것은 주로 외적 요인에 인한 것이며 물질적 가치에 관한 것이다. 개밥그릇을 노렸던 고고학자, 점순이와 혼인하려는 '나', 청새치의 뼈만 가져온 산티아고 노인은 모두 나름의 실패나 파멸을 경험한다.

그 반면에 패배라는 것은 개인의 정신적 가치에 속한 것이다. 물질적 가치에 관한 파멸과 달리, 정신적 가치에 관련된 패배는 바로 자기 자신이 스스로 결정한다. 그러니 패배는 자신의 내적 선택이기에, 누구나 파멸은 종종 경험하지만, 파멸하였다고 하여 그 모두가 패배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자는 결코 패배한 자가 되지 않는다.

산티아고 노인에게도 패배는 없다. 그는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 순간에 최선을 다했고 그러기에 좌절하지 않았다. 깊은 휴식의 잠에서 깨어나서는 다시 고기잡이를 나가자고 마놀린에게 약속한다. 그는 잠 속에서 사자의 꿈을 꾼다. 그 꿈속의 사자는 꺼지지 않는 희망의 불꽃이며 포기를 모르는 젊음의 생명력이다.

우리 모두는 산티아고 노인이다. 다음 날이면 고고학자는 또 다른 개밥그릇을 구출하려 돌아다닐 것이고, 봄봄의 ''는 장인과 드잡이질을 하며 점순이와의 혼인을 재촉할 것이다. 다들 낮에 무슨 일을 겪었더라도 잠자리에 누우면 어김없이 제 나름의 사자 꿈을 꾼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싱싱한 생명력을 재충전하여 사자처럼 깨어난다.

챗GPT에게 도약하며 포효하는 그림을 그려달라고 했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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