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경영과 세상살이/설원(說苑)_유향(劉向)

반질(券二十 反質)_설원(說苑) _ 유향(劉向)

by 변리사 허성원 2022. 8. 7.

반질(券二十 反質)_설원(說苑) _ 유향(劉向)

 

** 역문은 동양고전DB에서 가져옴.

**   人爲的 奢侈 虛飾을 버리고 事物 本質을 지켜야 함을 일깨우는 내용으로 편성하였다. 먼저 本質이 넉넉한 것은 꾸미는 것을 수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용하고, 鬼神을 믿기보다는 道德을 믿는 것이 낫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다음으로 여기에 부합하는 사례들을 제시하여 質朴한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함을 증명하였다.
機智가 있으면 기지 때문에 실패한다는 道家 觀點을 내세워 機巧을 반대하였고, 화려한 衣服, 高大 宮室, 과도한 奢侈를 경계하였다. 秦 始皇이 사치한 생활을 추구하다가 결국 나라를 멸망시킨 일을 敎訓으로 삼아 옛 明君이 음식은 배가 부르면 족하고, 옷은 몸에 따뜻하면 족하며, 궁실은 거처할 정도면 족하고, 車馬는 타고 다닐 정도면 족하게 여긴 것을 으로 삼아야 함을 표현하였다. 節儉하면 나라를 일으키고 奢侈하면 나라를 멸망시킨다는 관점에서 간소한 복장, 재물의 저장과 건축의 확장을 반대하며, 술을 절제하고 간소한 葬禮 등을 말하여 反質 氣風 提唱하였다.

 

1. 丹漆不文,白玉不彫,寶珠不飾,何也?質有餘者,不受飾也。

孔子卦得賁,喟然仰而歎息,意不平。子張進,舉手而問曰:「師聞賁者吉卦,而歎之乎?」孔子曰:「賁非正色也,是以歎之。吾思夫質素,白當正白,黑當正黑。夫質又何也?吾亦聞之,丹漆不文,白玉不彫,寶珠不飾,何也?質有餘者,不受飾也。

孔子께서 점을 쳐서 賁卦를 얻으시고 하늘을 우러러보고 길게 탄식하시어 마음이 평안하지 않으셨다子張이 앞으로 나와 손을 들고 물었다. “(자장의 이름)는 들으니, 비괘는 한 괘라는데 어찌 탄식을 하십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비는 순수한 빛깔[正色]이 아니기 때문에 탄식하였다. 나는 순수한 본질이기를 생각하니, 흰색이면 순수한 흰색이고, 검정색이면 순수한 검정색이기를 바란다.” 자장이 물었다.본질은 또 어떤 것입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나는 또 들으니, 붉은 칠[丹漆]은 다른 빛깔로 더 꾸미지 않고, 白玉은 다시 쪼아 새기지 않으며, 寶珠는 다시 장식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무엇 때문인가? 본질이 넉넉한 것은 더 꾸미는 것을 수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2. 信鬼神者失謀,信日者失時

信鬼神者失謀,信日者失時,何以知其然?夫賢聖周知,能不時日而事利;敬法令,貴功勞,不卜筮而身吉;謹仁義,順道理,不禱祠而福。故卜數擇日,潔齋戒,肥犧牲,飾珪璧,精祠祀,而終不能除悖逆之禍,以神明有知而事之,乃欲背道妄行而以祠祀求福,神明必違之矣。天子祭天地、五嶽、四瀆,諸侯祭社稷,大夫祭五祀,士祭門戶,庶人祭其先祖。聖王承天心,制禮分也。凡古之卜日者,將以輔道稽疑,示有所先而不敢自專也;非欲以顛倒之惡而幸安之全。孔子曰:「非其鬼而祭之,諂也。」是以泰山終不享李氏之旅,易稱東鄰殺牛,不如西鄰之禴祭,蓋重禮不貴牲也,敬實而不貴華。誠有其德而推之,則安往而不可。是以聖人見人之文,必考其質。

鬼神을 믿는 사람은 計策을 잃고, 時日의 길흉을 믿는 사람은 時機를 잃는다. 무엇으로 그러한 줄을 아는가? 聖賢은 일체를 두루 알아서 시일을 헤아리지 않고서도 일을 유리하게 처리한다. 法令을 공경히 준수하고 공로를 귀중히 여기면 점을 치지 않아도 몸에 吉함을 얻고 仁義를 삼가 행하며 道理를 따르면 제사하여 빌지 않아도 복을 받는다.

그러므로 점을 헤아려 좋은 날을 가리며 정결하게 재계하며 살찐 犧牲을 바치며 祭器으로 장식하며 정결한 마음으로 제사를 지내더라도 끝내 순리를 거스르는 災禍를 제거하지 못한다. 神明이 아는 것이 있다 하여 그를 섬기더라도 도리를 위배하고 함부로 나쁜 짓을 하면서 제사 지내어 복을 받기를 구한다면 신명은 반드시 그의 뜻을 어길 것이다.

天子天地五嶽四瀆에 제사를 지내고, 제후는 社稷에 제사를 지내고, 大夫五祀에 제사를 지내고, 에 제사를 지내고, 庶人은 그의 先祖에게 제사를 지낸다. 이는 聖王이 하늘의 뜻을 받들어 등급을 정해 를 제정한 것이다. 고대에 시일을 점쳐 정하는 것은 장차 正道를 돕고 의심나는 일을 고찰하여 먼저 하늘의 뜻이 있는 곳을 보여주어 감히 자기 마음대로 하지 않으려는 것이지, 常道에 반대되는 나쁜 행위를 하고서 안전하기를 바라려는 것은 아니다.

孔子께서는 제사 지낼 대상이 아닌 신에게 제사하는 것이 아첨이다.”라고 하셨다. 이 때문에 泰山의 신은 끝내 季氏가 지내는 旅祭를 흠향하지 않았다. 周易에는 동쪽 이웃이 소를 잡아 성대하게 제사 지내는 것이 서쪽 이웃이 박한 제물로 지내는 제사[禴祭]보다 못하다.” 하였다. 이는 예의를 중시한 것이지 犧牲을 중시한 것이 아니고, 성실한 마음을 존경한 것이지 화려한 외모를 귀중하게 여긴 것이 아니다. 진실로 이 있어서 이를 미루어 넓힌다면 무슨 일인들 되지 않겠는가. 이 때문에 聖人이 사람의 겉꾸밈을 보면 반드시 그 본질을 고찰하였다.

3. 聖人抑其文而抗其質,則天下反矣,

歷山之田者善侵畔,而舜耕焉;雷澤之漁者善爭陂,而舜漁焉;東夷之陶器窳,而舜陶焉。故耕漁與陶非舜之事,而舜為之,以救敗也。民之性皆不勝其欲,去其實而歸之華,是以苦窳之器,爭鬥之患起,爭鬥之患起,則所以偷也。所以然者何也?由離誠就詐,棄樸而取偽也,追逐其末而無所休止。聖人抑其文而抗其質,則天下反矣,

歷山에서 농사짓는 사람은 남의 밭두렁을 침범하여 점유하기를 잘하였으나 帝舜은 이곳에서 농사지었고, 雷澤에서 물고기 잡는 사람은 남의 방죽을 쟁탈하기를 잘하였으나 제순은 이곳에서 물고기를 잡았으며, 東夷가 생산하는 陶器는 이지러져서 견고하지 못했으나 제순은 이곳에서 도기를 만들었다. 그러므로 농사짓는 일과 물고기 잡는 일과 도기 만드는 일은 제순이 해야 할 일이 아닌데, 제순이 이 일을 한 것은 나쁜 풍속을 바로잡으려 했기 때문이다.

사람의 本性은 모두 자기의 욕망을 억제하지 못하여 實樸한 본질을 버리고 浮華한 데로 돌아간다. 이 때문에 거칠고 열악한 도기를 만들어내고, 서로 다투는 환난이 일어난다. 서로 다투는 환난이 일어나면 풍속이 투박하게 되니, 그렇게 된 까닭은 무엇 때문인가? 성실함을 떠나서 속이는 길로 나아가 실박한 본질을 버리고 虛僞를 취하여 그침 없이 그 지엽적인 말단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聖人이 그 文飾을 억제하여 실박한 본질을 提起하면 천하 사람들이 실박한 본질로 되돌아간다.

4. 夫誠者一也,一者質也;君子雖有外文,必不離內質矣

詩云:「尸鳩在桑,其子七兮;淑人君子,其儀一兮。」傳曰:「尸鳩之所以養七子者,一心也;君子所以理萬物者,一儀也。以一儀理物,天心也;五者不離,合而為一,謂之天心。在我能因自深結其意於一,故一心可以事百君,百心不可以事一君,是故誠不遠也。夫誠者一也,一者質也;君子雖有外文,必不離內質矣。」

詩經뻐꾸기가 뽕나무 위에 있으니, 그 새끼가 일곱 마리이네. 선량한 군자여! 威儀가 한결같구나.”라 하였다.

이를 해설한 뻐꾸기가 일곱이나 되는 새끼를 기르는 것은 한결같은 마음을 다하기 때문이요, 君子萬物을 다스리는 것은 한결같은 위의를 견지하기 때문이다. 한결같은 위의로 만물을 다스리는 것은 하늘의 뜻을 體現하는 것이니, 다섯 가지를 위배하지 아니하여 하나로 통합하는 것을 하늘의 뜻이라고 한다.

내가 능히 이를 따라 스스로 깊이 그 뜻을 한결같이 결속하는 데 달려 있다. 그러므로 한결같은 마음은 백 명의 임금을 섬길 수 있고, 백 갈래의 마음은 한 명의 임금도 섬길 수 없다. 이 때문에 誠實은 나의 몸에서 멀리 떠나 있는 것이 아니다. 성실은 한결같은 것이고, 한결같음은 신실한 본질이니, 군자가 외면의 문식을 강구하더라도 반드시 내면의 본질을 떠나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5. 有機知之巧,必有機知之敗

衛有五丈夫,俱負缶而入井灌韭,終日一區。鄧析過,下車為教之,曰:「為機,重其後,輕其前,命曰橋。終日灌韭,百區不倦。」五丈夫曰:「吾師言曰:有機知之巧,必有機知之敗;我非不知也,不欲為也。子其往矣,我一心溉之,不知改已!」鄧析去,行數十里,顏色不悅懌,自病。弟子曰:「是何人也?而恨我君,請為君殺之。」鄧析曰:「釋之,是所謂真人者也。可令守國。」

나라에 다섯 남자가 있어서 물동이를 짊어지고 샘에 들어가 물을 길어다가 부추 밭에 물을 주는데 온종일 한 이랑밖에 물을 주지 못하였다鄧析이 지나가다가 수레에서 내려 물 주는 방법을 가르쳐주면서 말했다. “기계를 만들되 뒤쪽은 무겁게 하고 앞쪽은 가볍게 만들어야 되니 이름을 라고 하지요. 하루 종일 백 이랑의 부추 밭에 물을 주어도 피곤하지 않을 것이오.”

다섯 남자가 말했다. “우리 스승께서 말씀하시기를, 교묘한 機智가 있으면 반드시 기지 때문에 실패하는 일이 있다.’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기계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만들려고 하지 않을 뿐이오. 그대는 가시오. 우리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물을 줄 뿐 다른 방법으로 바꾸는 것은 모르오.

등석이 그곳을 떠나 수십 리를 가도록 언짢은 안색으로 스스로를 탓하였다. 제자들이 말했다. “이들은 어떤 사람이기에 우리 선생님을 번민하게 한단 말입니까. 선생님을 위하여 죽여버리겠습니다.”등석이 말했다. “그만두어라. 이 사람들은 이른바 眞人이니, 나라를 지키게 할 만하다.”

6. 為可長,行可久,先質而後文

禽滑釐問於墨子曰:「錦繡絺紵,將安用之?」墨子曰:「惡,是非吾用務也。古有無文者得之矣,夏禹是也。卑小宮室,損薄飲食,土階三等,衣裳細布;當此之時,黻無所用,而務在於完堅。殷之盤庚,大其先王之室,而改遷於殷,茅茨不剪,采椽不斲,以變天下之視;當此之時,文采之帛,將安所施?夫品庶非有心也,以人主為心,苟上不為,下惡用之?二王者以化身先于天下,故化隆於其時,成名於今世也。且夫錦繡絺紵,亂君之所造也,其本皆興於齊,景公喜奢而忘儉,幸有晏子以儉鐫之,然猶幾不能勝。夫奢安可窮哉?紂為鹿臺糟丘,酒池肉林,宮牆文畫,彫琢刻鏤,錦繡被堂,金玉珍瑋,婦女優倡,鐘鼓管絃,流漫不禁,而天下愈竭,故卒身死國亡,為天下戮,非惟錦繡絺紵之用耶?今當凶年,有欲予子隨侯之珠者,不得賣也,珍寶而以為飾;又欲予子一鍾粟者,得珠者不得粟,得粟者不得珠,子將何擇?」禽滑釐曰:「吾取粟耳,可以救窮。」墨子曰:「誠然,則惡在事夫奢也?長無用,好末淫,非聖人所急也。故食必常飽,然後求美;衣必常暖,然後求麗;居必常安,然後求樂。為可長,行可久,先質而後文,此聖人之務。」禽滑釐曰:「善。」

禽滑釐墨子에게 물었다. “수놓은 비단과 곱게 짠 葛布를 어디에 쓰시렵니까?”

묵자가 대답했다. “, 이것은 내가 힘쓸 일이 아니다. 고대에 화려하게 꾸미지 않은 사람이 있어서 이 도리를 터득하였으니, 夏禹가 이분이다. 집은 낮고 작으며, 음식은 줄이고 변변찮으며, 세 층의 흙 계단만 쌓고, 의복은 작은 베 조각을 이어 만들었다. 이런 때에는 黼黻을 쓸 곳이 없어서 완전하고 견고한 데에 힘썼다.

나라의 盤庚은 선왕이 이룩한 王室을 확대하고 도읍을 바꾸어 으로 옮겨서 띠로 이은 추녀의 끝을 가지런하게 자르지 않고 떡갈나무 서까래를 깎아 다듬지 아니하여 천하 사람들의 인식을 변화시켰다. 이런 때에 화려한 비단을 장차 어디에 쓰겠는가. 백성[品庶]은 주견이 없어, 임금이 좋아하는 것으로 마음을 삼는다.

만일 윗사람이 하지 않으면 아랫사람이 어찌 그것을 쓰겠는가. 앞의 두 帝王은 자신이 천하 사람들에게 솔선하였다. 그러므로 그 당시에 교화가 크게 행해지고, 지금까지 아름다운 명성이 전해진다. 게다가 수놓은 비단과 곱게 짠 葛布는 혼란한 군주가 만들어낸 것이다. 그 근원은 모두 나라에서 시작되었으니, 齊 景公이 사치를 좋아하여 검소함을 잊었으나, 다행히 晏子가 있어서 검소의 도리를 경계하여 권면하였다. 그러나 거의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였으니, 사치하는 풍조를 어찌 그치게 할 수 있겠는가殷紂鹿臺槽丘酒池肉林을 만들고, 궁궐 담에 그림을 그리며, 기둥과 들보를 아름답게 조각하고, 수놓은 비단이 을 덮으며, 金玉 같은 珍寶가 그득하고, 미녀와 광대, 鐘鼓管絃樂器를 질탕하게 울리고 방종한 생활을 금하지 않아 천하의 재력이 더욱 고갈되었다. 그 때문에 끝내 자신은 죽고 나라는 멸망하여 천하 사람들의 치욕을 받았으니, 수놓은 비단과 곱게 짠 葛布를 써서 사치한 일에 기인한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 흉년을 당하여 어떤 이가 너에게 隨侯의 구슬을 주려고 하면서 말하기를, ‘팔아서는 안 되니, 珍寶로 여겨 장식품을 만들어라.’ 하고, 또 어떤 이가 너에게 한 의 곡식을 주려고 하되, 구슬을 얻은 자는 곡식을 얻을 수 없고, 곡식을 얻은 자는 구슬을 얻을 수 없다고 하면, 자네는 어떤 것을 선택하겠느냐?”

금골리가 말했다. “저는 곡식을 취하겠으니, 곡식은 곤궁을 구제할 수 있습니다.”묵자가 말했다. “진실로 그렇다면 어찌 사치를 일삼을 필요가 있겠는가. 사치하는 물건은 영원히 쓸데없는 것이다. 말단의 향락적인 것은 성인이 긴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므로 먹는 것은 반드시 항상 배가 부른 뒤에야 맛있는 음식을 찾고, 입는 것은 반드시 항상 몸이 따뜻한 뒤에야 화려한 옷을 찾으며, 거처는 반드시 항상 편안한 뒤에야 안락한 거처를 찾는 것이다. 항상 할 수 있고 오래갈 수 있는 것을 고려한다면 질박함을 먼저 추구하고 문식을 뒤에 강구하여야 한다. 이것이 성인이 힘쓸 일이다.”금골리가 말했다. “좋은 말씀입니다.”

7.

秦始皇既兼天下,大侈靡,即位三十五年猶不息,治大馳道,從九原抵雲陽,塹山堙谷直通之。厭先王宮室之小,乃於豐鎬之間,文武之處,營作朝宮,渭南山林苑中作前殿,阿房東西五百步,南北五十丈,上可坐萬人,下可建五丈旗,周為閣道;自殿直抵南山之嶺以為闕,為複道,自阿房渡渭水屬咸陽,以象天極,閣道絕漢,抵營室也。又興驪山之役,錮三泉之底,關中離宮三百所,關外四百所,皆有鐘磐帷帳,婦女倡優。立石闕東海上朐山界中,以為秦東門。於是有方士韓客侯生,齊客盧生,相與謀曰:「當今時不可以居,上樂以刑殺為威,天下畏罪;持祿莫敢盡忠,上不聞過而日驕,下懾伏以慢欺而取容,諫者不用而失道滋甚。吾黨久居,且為所害。」乃相與亡去。始皇聞之大怒,曰:「吾異日厚盧生,尊爵而事之,今乃誹謗我,吾聞諸生多為妖言以亂黔首。」乃使御史悉上諸生,諸生傳相告,犯法者四百六十餘人,皆坑之。盧生不得,而侯生後得,始皇聞之,召而見之,升阿東之臺,臨四通之街,將數而車裂之。始皇望見侯生,大怒曰:「老虜不良,誹謗而主,迺敢復見我!」侯生至,仰臺而言曰:「臣聞知死必勇,陛下肯聽臣一言乎?」始皇曰:「若欲何言?言之!」侯生曰:「臣聞禹立誹謗之木,欲以知過也。今陛下奢侈失本,淫泆趨末,宮室臺閣,連屬增累,珠玉重寶,積襲成山,錦繡文采,滿府有餘,婦女倡優,數巨萬人,鍾鼓之樂,流漫無窮,酒食珍味,盤錯於前,衣服輕暖,輿馬文飾,所以自奉,麗靡爛熳,不可勝極。黔首匱竭,民力單盡,尚不自知,又急誹謗,嚴威克下,下喑上聾,臣等故去。臣等不惜臣之身,惜陛下國之亡耳。聞古之明王,食足以飽,衣足以暖,宮室足以處,輿馬足以行,故上不見棄於天,下不見棄於黔首。堯茅茨不剪,采椽不斲,土階三等,而樂終身者,俗以其文采之少,而質素之多也。丹朱傲虐好慢淫,不修理化,遂以不升。今陛下之淫,萬丹朱而十昆吾桀紂,臣恐陛下之十亡也,而曾不一存。」始皇默然久之,曰:「汝何不早言?」侯生曰:「陛下之意,方乘青雲飄搖於文章之觀,自賢自健,上侮五帝,下凌三王,棄素樸,就末技,陛下亡徵見久矣。臣等恐言之無益也,而自取死,故逃而不敢言。今臣必死,故為陛下陳之,雖不能使陛下不亡,欲使陛下自知也。」始皇曰:「吾可以變乎?」侯生曰:「形已成矣,陛下坐而待亡耳!若陛下欲更之,能若堯與禹乎?不然無冀也。陛下之佐又非也,臣恐變之不能存也。」始皇喟然而歎,遂釋不誅。後三年始皇崩;二世即位,三年而秦亡。

秦 始皇이 이미 천하를 겸병하고 나서 크게 사치하였다. 즉위한 지 35년이 되었는데도 오히려 사치를 그치지 않아 크게 馳道를 닦아서 九原에서부터 雲陽에 이르기까지 산을 깎고 골짜기를 메워 곧장 통하게 하였다. 先王의 협소한 宮室을 혐오하여 鎬京 사이 周 文王武王이 거처하던 곳인 渭水 南山林苑王宮을 지었다.

正殿(前殿)阿房宮을 지었는데, 東西의 길이는 500, 남북의 넓이는 50으로, 그 위에는 1만 명이 앉을 수 있고, 아래에는 5길이의 旗幟를 세울 수 있었다. 사방 둘레에 閣道를 만들어 궁전 아래에서 곧장 南山의 정상에 도달하여 門闕을 만들고, 複道를 만들어 아방궁에서 渭水를 건너 咸陽에 닿게 하여 天極星閣道星이 은하수를 가로질러 營室星에 닿아 있는 天體를 상징하였다.

驪山陵墓 공사를 일으켜 三泉의 밑바닥에 구리를 녹여 부어 막았다. 函谷關 서쪽[關中]에 있는 별궁[離宮] 300곳과 함곡관 동쪽[關外]에 있는 별궁 400곳에 모두 鐘磬과 장막을 설치하고 미녀와 광대를 배치하였다. 東海 가의 朐山 경계에 石闕을 세워 진나라의 東門으로 삼았다.

이때에 方士나라 사람인 侯生나라 사람인 盧生이 서로 상의하여 말했다. “현재 여기에 그대로 살 수가 없다. 皇上은 사형에 처하는 형벌로 위엄을 보이기를 즐거워하고 신하들은 죄에 걸릴까 두려워하여 녹봉만을 유지하면서 충성을 다하지 않는다. 황상은 자신의 잘못을 듣지 못하여 날마다 더욱 교만해지고, 신하들은 두려워 복종하면서 태만과 속임수로 아첨을 떨어 용납되기를 구한다. 하는 사람을 重用하지 않아 道義를 위배하는 일이 더욱 심하다. 우리들이 이곳에 오래 머물면 장차 살해를 당할 것이다.”그러고는 즉시 함께 도망쳐버렸다.

진 시황이 이 사실을 듣고 크게 노하여 말했다. “내가 지난날 노생을 후하게 대우하여 벼슬을 높여주고 섬겼는데, 지금 나를 비방하는구나. 나는 들으니, 諸生들이 요상한 말을 많이 만들어 백성들을 혼란시킨다고 한다.”그러고는 곧 御使를 파견하여 제생들을 모두 조사하여 심문하게 하였다제생들이 서로 告引하여 법을 범한 사람이 460여 명이나 되었는데 모두 구덩이에 묻어 죽였다. 노생은 잡지 못하였고, 후생은 뒤에 잡으니, 시황이 이를 듣고 후생을 불러 직접 만나고자 하였다. 阿東臺에 올라 사통팔달의 거리를 마주하여 후생의 죄를 열거한 뒤에 車裂刑에 처하려고 하였다. 시황이 후생을 멀리 바라보고 크게 노하여 말했다. “이 늙은 도적놈이 不良하여 네 임금을 비방하고서 감히 나를 다시 볼 수 있단 말이냐!” 후생이 당도하여 누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은 들으니, 죽을 줄을 알면 반드시 용감해진다고 합니다. 陛下께서는 신의 한마디 말씀을 들어주시겠습니까?” 시황이 말했다. “너는 무슨 말을 하려느냐? 말해보거라.”

후생이 말했다. “신은 들으니, 夏禹誹謗하는 말을 쓰는 나무를 세운 것은 자기의 잘못을 알려고 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폐하께서는 사치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을 잃고, 음란하고 방종하여 향락을 추구하며, 궁실과 臺閣이 중첩되어 서로 이어지고, 珠玉珍寶가 쌓여 산을 이루며, 화려한 색채로 수놓은 비단이 창고에 가득 차 넘치고, 미녀와 광대의 수가 만 명이나 되며, 鐘鼓의 연주 소리가 끝없이 울려 퍼지고, 맛있는 술과 음식이 앞에 널려 있으며, 의복은 가볍고 따뜻하며, 수레와 말은 아름답게 장식하여, 자신을 봉양하는 물품이 화려하고 찬란한 것을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백성들의 생활은 궁핍하고 民力은 모두 고갈되었는데 아직도 스스로 알지 못하고, 또 비방하는 말에 조바심을 내어 엄혹한 형벌로 아랫사람들을 제압하고 있습니다. 아래의 臣民들은 벙어리가 되고, 위의 황상은 귀머거리가 되었기 때문에 신 등이 떠난 것입니다. 신 등은 자신의 몸을 아끼는 것이 아니라, 폐하의 나라가 망하는 것을 애석하게 여길 뿐입니다. 듣건대 고대의 현명한 임금은 음식은 배가 부르면 그만이고, 옷은 몸이 따뜻하면 그만이며, 궁실은 거처할 만하면 그만이고, 수레와 말은 길을 가기만 하면 그만이라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위로는 하늘에게 버림을 받지 않고, 아래로는 백성들에게 버림을 받지 않았습니다. 帝堯는 띠로 이은 추녀의 끝을 가지런하게 자르지 않고, 떡갈나무 서까래를 깎아 다듬지 않으며, 세 층의 흙 계단을 쌓은 집에서 살았으나 일생 동안 즐겁게 지낸 것은 화려하게 꾸민 것이 적고 소박한 본질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丹朱는 오만하고 포학하며 음란함을 좋아하여 政事敎化修行하지 아니하여 마침내 帝位에 오르지 못했습니다현재 폐하의 방종한 생활은 단주보다 만 배나 더하고, 昆吾桀紂보다 천 배나 더하니, 신은 폐하께서 멸망할 행위는 열 가지나 하면서 보존할 행위는 한 가지도 하지 않는 것을 걱정하는 것입니다.

시황이 한동안 묵묵히 있다가 말했다. “너는 어찌 일찌감치 말하지 않았느냐?”

후생이 말했다. “폐하의 意氣가 한창 靑雲을 타고 하늘에 올라 화려하게 꾸민 宮觀에 맴돌고, 스스로 현명하고 스스로 굳세다고 여기어, 위로는 五帝를 업신여기고, 아래로는 三王을 능멸하며, 소박한 생활의 원칙을 버리고 말단의 방종한 생활을 추구하니 폐하의 멸망할 징조가 나타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신 등은 말씀드려 봤자 유익함은 없고, 스스로 죽음만을 얻을까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도망치고 감히 말하지 못했었는데, 지금 신은 반드시 죽게 될 것입니다. 그 때문에 폐하를 위해 말씀드리는 것이니, 폐하를 멸망하지 않게 할 수는 없지만 폐하께서 스스로 이를 아시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시황이 말했다. “내가 바르게 변할 수 있겠느냐?”

후생이 말했다. “망할 형세가 벌써 정해졌으니, 폐하께서는 그대로 앉아서 멸망하기만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폐하께서 바르게 고치려고 하신다면 능히 帝堯夏禹같이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희망이 없습니다. 폐하의 보필하는 신하들 또한 옳지 않으니, 신은 폐하가 변하여도 나라를 보존하지 못할까 걱정됩니다.”

시황이 한숨을 쉬며 탄식하고는 마침내 후생을 誅殺하지 않고 석방하였다. 그 뒤 3년 만에 시황이 죽고, 二世가 즉위했으나, 3년이 지나 진나라는 멸망하였다.

8.

魏文侯問李克曰:「刑罰之源安生?」李克曰:「生於姦邪淫泆之行。凡姦邪之心,飢寒而起,淫泆者,久飢之詭也;彫文刻鏤,害農事者也;錦繡纂組,傷女工者也。農事害,則飢之本也;女工傷,則寒之源也。飢寒並至而能不為姦邪者,未之有也;男女飾美以相矜而能無淫泆者,未嘗有也。故上不禁技巧,則國貧民侈,國貧窮者為姦邪,而富足者為淫泆,則驅民而為邪也;民以為邪,因之法隨,誅之不赦其罪,則是為民設陷也。刑罰之起有原,人主不塞其本,而替其末,傷國之道乎?」文侯曰:「善。」以為法服也。

魏 文侯李克에게 물었다. “형벌을 받는 근원은 어디에서 생기는 것이오?”

이극이 말했다. “간사하고 淫佚한 행위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간사한 마음은 굶주림과 추위에서 발생하고, 음일은 과도하게 꾸미고 사치하여 미혹된 데서 연유합니다. 들보와 기둥을 조각하고 깎게 하는 것은 농사를 방해하고, 아름다운 비단을 짜게 하는 것은 女工을 방해합니다. 농사를 방해하는 것은 굶주림을 부르는 근본이고, 女工을 손상시키는 것은 추위에 떨게 하는 근원입니다.

굶주림과 추위가 함께 닥쳤는데도 간사한 짓을 하지 않는 사람은 없고, 남녀가 서로 아름답게 꾸민 것을 자랑하는데도 음일한 행위를 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임금이 技巧를 금지하지 않으면 나라는 가난하고 백성은 사치하게 됩니다. 나라가 가난하고 백성이 사치하여 貧窮한 사람이 간사한 짓을 하고, 부유한 사람이 음일한 행위를 하면, 이는 백성들을 몰아 사악한 짓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사악한 짓을 하거든 그대로 법에 따라 처벌하여 지은 죄를 용서해주지 않으면 이는 백성을 잡기 위해 함정을 설치한 것입니다. 형벌이 발생하는 것은 그 근원이 있는 것인데, 임금이 그 근원은 막지 않고 그 지엽적인 것만 폐기한다면 나라를 손상시키는 길일 것입니다.”문후가 말했다. “좋은 말이오. 이 말을 準則으로 삼겠소.”

9. 當以儉得之,以奢失之

秦穆公閑,問由余曰:「古者明王聖帝,得國失國當何以也?」由余曰:「臣聞之,當以儉得之,以奢失之。」穆公曰:「願聞奢儉之節。」由余曰:「臣聞堯有天下,飯於土簋,啜於土鈃,其地南至交趾,北至幽都,東西至日所出入,莫不賓服。堯釋天下,舜受之,作為食器,斬木而裁之,銷銅鐵,脩其刃,猶漆黑之以為器。諸侯侈國之不服者十有三。舜釋天下而禹受之,作為祭器,漆其外而朱畫其內,繒帛為茵褥,觴勺有彩,為飾彌侈,而國之不服者三十有二。夏后氏以沒,殷周受之,作為大器,而建九傲,食器彫琢,觴勺刻鏤,四壁四帷,茵席彫文,此彌侈矣,而國之不服者五十有二。君好文章,而服者彌侈,故曰儉其道也。」由余出,穆公召內史廖而告之曰:「寡人聞鄰國有聖人,敵國之憂也。今由余聖人也,寡人患之。吾將奈何?」內史廖曰:「夫戎辟而遼遠,未聞中國之聲也,君其遺之女樂以亂其政,而厚為由余請期,以疏其間,彼君臣有間,然後可圖。」君曰:「諾。」乃以女樂三九遺戎王,因為由余請期;戎王果具女樂而好之,設酒聽樂,終年不遷,馬牛羊半死。由余歸諫,諫不聽,遂去,入秦,穆公迎而拜為上卿。問其兵勢與其地利,既已得矣,舉兵而伐之,兼國十二,開地千里。穆公奢主,能聽賢納諫,故霸西戎,西戎淫於樂,誘於利,以亡其國,由離質樸也。

秦 穆公由余에게 물었다. “옛날의 현명하고 거룩한 帝王이 나라를 얻고, 나라를 잃은 것은 오히려 무엇 때문이오?” 유여가 대답했다. “臣은 들으니, 당연히 儉素함으로 나라를 얻고, 奢侈함으로 나라를 잃었다고 하였습니다.” 목공이 말했다. “사치와 검소에 관한 일을 듣고 싶소.”

유여가 말했다. “신은 들으니, 帝堯가 천하를 소유했을 적에 土簋에 밥을 담아 먹고, 土甁에 물을 담아 마셨지만 그의 疆域은 남쪽으로는 交趾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幽都에 이르렀으며, 동쪽과 서쪽은 해가 뜨고 지는 데까지 이르러 누구도 복종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제요가 천하를 禪讓한 뒤에 帝舜이 이어받아 食器를 만들되 나무를 베어 제작하고, 구리와 쇠를 녹여 칼을 만들며, 게다가 검은 옻칠을 하여 器物을 만들자 諸侯들이 사치하여 복종하지 않는 나라가 13국이었습니다. 제순이 천하를 선양한 뒤에 夏禹가 이어받아 祭器를 만들되 겉은 검은 옻칠을 하고 안은 붉은색을 칠하였고, 비단으로 까는 자리를 만들었으며, 술잔과 구기는 채색으로 장식하여 더욱 사치스럽게 꾸미자 복종하지 않는 나라가 32국이었습니다夏后氏가 몰락한 뒤에 나라와 나라가 뒤를 이어 大路(大輅)九旒를 만들고, 식기에 조각을 하며, 술잔과 구기에 무늬를 아로새기고, 사면의 벽에 휘장을 치며, 까는 자리에는 꽃무늬를 수놓아 이처럼 더욱 사치하니, 복종하지 않는 나라가 52국이었습니다. 임금이 사치스럽게 꾸미기를 좋아하면 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더욱 사치하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검소함은 나라를 얻는 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유여가 자리에서 나가자, 목공이 內史廖를 불러 유여와 나눈 이야기를말해주었다. “寡人은 들으니, 이웃나라에 聖人이 있으면 대등한 나라의 걱정거리가 된다고 했소. 그런데 지금 저 유여는 성인이오. 과인은 이를 걱정하고 있으니,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되겠소?”

내사요가 말했다. 西戎이 사는 곳은 외지고 아주 멀어서 中國의 음악을 들어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임금께서는 여자 樂工을 보내시어 그 나라의 정치를 어지럽게 하시고, 유여는 厚待하여 이곳에 오래 머물게 해달라고 요청하여 그들의 君臣 사이를 소원하게 하십시오. 저들의 군신 사이에 간격이 생기거든 그런 다음에 그들을 도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목공이 그렇게 하겠소.” 하고는 곧 여자 악공 16명을 서융 왕에게 보내고, 아울러 유여를 오래 머물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서융 왕은 과연 여자 악공을 보고는 좋아하여 술자리를 열고 음악 연주를 듣느라 한 해가 다 가도록 遊牧하는 장소를 옮기지 않아 말‧소‧양의 무리가 반이나 죽었다. 유여가 귀국하여 서융 왕에게 諫言을 올렸으나 간언을 따르지 않으니, 마침내 그곳을 떠나 秦나라로 들어오고 말았다.

목공은 그를 맞이하여 上卿에 임명하고, 서융의 兵力의 정황과 지리의 형세를 물었다. 이미 서융의 병력과 지리를 알고 난 뒤에 군대를 출동시켜 토벌하여 열두 나라를 겸병하고 천 리의 영토를 개척하였다. 진 목공은 원래 사치하는 군주였지만 어진 신하의 말을 따르고 간언을 수용하였다. 그러므로 서융 지역의 霸子가 되었고, 서융 왕은 음악에 빠지고 이익에 유혹 당하여 나라를 멸망시키고 말았으니, 質朴의 원칙에서 떠났기 때문이다.

10. 主信臣忠,百姓上戴。此魏之寶也

經侯往適魏太子,左帶羽玉具劍,右帶環佩,左光照右,右光照左;坐有頃,太子不視也,又不問也。經侯曰:「魏國亦有寶乎?」太子曰:「有。」經侯曰:「其寶何如?」太子曰:「主信臣忠,百姓上戴。此魏之寶也。」經侯曰:「吾所問者,非是之謂也。乃問其器而已。」太子曰:「有。徒師沼治魏而市無豫賈,郤辛治陽而道不拾遺,芒卯在朝而四鄰賢士無不相因而見。此三大夫乃魏國之大寶。」於是經侯默然不應,左解玉具,右解環佩,委之坐,愆然而起,默然不謝,趨而出,上車驅去。魏太子使騎操劍佩逐與經侯,使告經侯曰:「吾無德所寶,不能為珠玉所守;此寒不可衣,飢不可食,無為遺我賊。」於是經侯杜門不出,傳死。

經侯魏 太子에게 갈 적에 왼쪽에는 으로 장식한 寶劍을 차고, 오른쪽에는 環佩를 차고 있어서 왼쪽의 광채는 오른쪽을 비치고, 오른쪽의 광채는 왼쪽을 비쳐 번쩍거렸다. 한참 동안 앉아 있었으나 태자는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또 그에게 묻지도 않았다경후가 말했다. “위나라에도 보물이 있습니까?” 태자가 말했다. “보물이 있지요.” 경후가 말했다. “그 보물은 어떤 것입니까?”

태자가 말했다. “임금은 信義가 있고 신하는 충성스러워서 백성들이 임금을 떠받들고 있으니, 이것이 위나라의 보물입니다.”

경후가 말했다. “내가 보물에 대해 물은 것은 이런 걸 말한 것이 아닙니다. 바로 어떤 器物인지를 물은 것일 뿐입니다.” 태자가 말했다. “있지요. 徒師沼가 위나라를 다스릴 적에 시장에 물건 값을 속이는 행위가 없었고, 郄辛陽邑을 다스릴 적에 길에 흘린 물건을 주워 가는 사람이 없었으며, 芒卯가 조정에 있을 적에 사방 이웃나라의 어진 선비들이 서로 이끌어 뵙지 않은 사람이 없었소. 그러니 이 세 분의 大夫는 바로 위나라의 큰 보물입니다.”

이에 경후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잠자코 있더니, 왼쪽에 찼던 옥으로 장식한 검을 풀고, 오른쪽에 찼던 환패를 풀어서 자리에 놓아두고 겸연쩍어하며 일어나 묵묵히 인사말도 하지 않은 채 달려 나가 수레를 타고 말을 몰아 가버렸다.

위 태자가 騎士를 시켜 검과 환패를 가지고 쫓아가서 경후에게 돌려주게 하고 경후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게 하였다. 나는 보물로 삼을 德이 없어서 이런 珠玉을 지킬 수 없소. 이 물건들은 추워도 옷을 만들어 입을 수 없고, 배가 고파도 먹을 수가 없으니, 나에게 災害를 남겨주는 일이 없게 하라.”이에 경후는 杜門不出하다가 부끄러움을 안고 죽었다.

11. 臣聞說天子者以天下,說諸侯者以國,說大夫者以官,說士者以事,說農夫者以食,說婦姑者以織

晉平公為馳逐之車,龍旌象色,挂之以犀象,錯之以羽芝,車成題金千鎰,立之於殿下,令群臣得觀焉。田差三過而不一顧,平公作色大怒,問田差「爾三過而不一顧,何為也?」田差對曰:「臣聞說天子者以天下,說諸侯者以國,說大夫者以官,說士者以事,說農夫者以食,說婦姑者以織。桀以奢亡,紂以淫敗,是以不敢顧也。」平公曰:「善。」乃命左右曰:「去車!」

晉 平公이 짐승을 쫓는 사냥용 수레를 만들어 여러 색깔로 용을 그린 깃발을 꽂고, 코뿔소의 뿔과 상아로 만든 장식물을 걸었으며, 깃털을 꽂아 장식한 수레 뚜껑을 씌웠다. 수레가 완성된 뒤에 값이 황금 천 이라고 써서 궁전 아래에 세워두고는 群臣에게 관람하도록 하였다田差가 세 차례나 그 앞을 지나가면서 한 번도 수레를 돌아보지 않으니, 평공이 안색을 바꾸면서 크게 노하여 전차에게 물었다. “네가 세 차례나 수레 앞을 지나가면서 한 번도 수레를 돌아보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이냐?”

전차가 대답했다. “은 들으니, 天子에게 遊說하는 사람은 천하를 다스리는 도리로 하고, 諸侯에게 유세하는 사람은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로 하며, 大夫에게 유세하는 사람은 관리 노릇하는 도리로 하고, 士에게 유세하는 사람은 일을 처리하는 도리로 하며, 農夫에게 유세하는 사람은 음식에 관한 도리로 하고, 婦女子에게 유세하는 사람은 길쌈하는 도리로 한다고 하였습니다. 夏桀은 사치 때문에 멸망하였고, 殷紂는 음란 때문에 敗亡하였으니, 이 때문에 제가 감히 수레를 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평공이 좋은 말이오.” 하고는 곧 측근의 신하에게 명하였다. “수레를 철거하라.”

12. 非其所藏者必有天災

魏文侯御廩災,文侯素服辟正殿五日,群臣皆素服而弔,公子成父獨不弔。文侯復殿,公子成父趨而入賀,曰:「甚大善矣!夫御廩之災也。」文侯作色不悅,曰:「夫御廩者,寡人寶之所藏也,今火災,寡人素服辟正殿,群臣皆素服而弔;至於子,大夫而不弔。今已復辟矣,猶入賀何為?」公子成父曰:「臣聞之,天子藏於四海之內,諸侯藏於境內,大夫藏於其家,士庶人藏於篋櫝。非其所藏者必有天災,必有人患。今幸無人患,乃有天災,不亦善乎!」文侯喟然嘆曰:「善!」

魏 文侯御廩에 화재가 나자 文侯가 흰옷을 입고 5일 동안 正殿을 떠나 있었다. 신하들이 모두 흰옷을 입고 위문하였으나 公子 成父만은 위문하지 않았다문후가 정전으로 돌아오니, 공자 성부가 종종걸음으로 들어와 하례하면서 말했다. “매우 좋습니다. 보물 창고에 화재가 난 것이 말입니다.”

문후는 기분이 나빠 안색이 변하며 말했다. “어름은 寡人이 보물을 간수하는 곳이오. 지금 화재가 나서 과인이 흰옷을 입고 정전을 떠나 다른 곳에 있었소. 신하들은 모두 흰옷을 입고 위문하였는데, 子大夫는 위문도 하지 않더니, 지금 내가 이미 정전으로 돌아오자 그대가 오히려 들어와 하례를 하니, 무엇 때문이오?”

공자 성부가 말했다. “은 들으니, 天子는 보물을 온 천하에 간수하고, 諸侯는 자기 나라 境內에 간수하며, 大夫는 그의 封邑 안에 간수하고, 士와 庶人은 상자나 궤 안에 간수한다고 합니다. 간수할 것이 아닌 경우에는, 하늘의 재앙이 있지 않으면 반드시 사람으로 인한 환난이 있는 법입니다. 그런데 지금 다행히 사람으로 인한 환난은 없고, 곧 하늘이 준 화재가 있으니, 어찌 좋은 일이 아닙니까!

문후가 한숨을 쉬고 탄식하며 말했다. “좋은 말이오.”

13. 非其所藏者必有天災

齊桓公謂管仲曰:「吾國甚小,而財用甚少,而群臣衣服輿駕甚汰,吾欲禁之,可乎?」管仲曰:「臣聞之,君嘗之,臣食之;君好之,臣服之。今君之食也必桂之漿,衣練紫之衣,狐白之裘。此群臣之所奢汰也。詩云:『不躬不親,庶民不信。』君欲禁之,胡不自親乎?」桓公曰:「善。」於是更制練帛之衣,大白之冠,朝一年而齊國儉也。

齊 桓公管仲에게 말했다. “우리나라는 매우 작고 재물도 적은데, 신하들의 衣服車馬는 매우 사치스럽소. 나는 이 풍조를 금지하려고 하는데 할 수 있겠소?”

관중이 말했다. “은 들으니, 임금이 飮食의 맛을 보면 신하는 먹고, 임금이 服飾을 좋아하면 신하는 입는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임금께서 음식을 먹을 때 반드시 桂皮의 음료수를 마시고, 자주색의 비단옷과 흰 여우 가죽의 갖옷을 입으시니, 이것이 바로 신하들이 사치하게 된 원인입니다. 詩經자기 몸소 하지 않으면 서민들이 믿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임금께서 사치하는 풍조를 금지시키려고 하신다면 어찌 자신부터 하시지 않습니까.”

환공이 좋은 말이오.” 하고는, 이에 거친 비단옷과 白布冠을 새로 고쳐 지어 착용하고 朝會를 보니, 1년이 지나자 제나라의 풍속이 검소하게 되었다.

14. 吾聞君子以德華國,不聞以妾與馬

季文子相魯,妾不衣帛,馬不食粟。仲孫它諫曰:「子為魯上卿,妾不衣帛,馬不食粟,人其以子為愛,且不華國也。」文子曰:「 然乎?吾觀國人之父母衣麤食蔬,吾是以不敢。且吾聞君子以德華國,不聞以妾與馬。夫德者得於我,又得於彼,故可行;若淫於奢侈,沈於文章,不能自反,何以守國?」仲孫它慚而退。

季文子나라의 재상 노릇을 할 적에 은 비단옷을 입지 못하고, 말은 곡식을 먹지 못하니, 仲孫它하였다. “그대가 노나라의 上卿이 되어 첩은 비단옷을 입지 못하고, 말은 곡식을 먹지 못하니, 남들이 그대를 인색하다 할 것이고, 또 나라를 빛내는 일이 아닙니다.”

계문자가 말했다. “그런가요? 내가 살펴보건대, 우리나라 백성들의 부모는 거친 베옷을 입고 거친 곡식의 밥을 먹고 있소. 내가 이 때문에 감히 사치하지 못하는 것이오. 또 나는 君子가 德으로 나라를 빛낸다는 말은 들었고, 첩과 말로 나라를 빛낸다는 말은 듣지 못했소. 덕은 바로 자기가 얻고, 또 남도 얻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미루어 행할 수 있는 것이오. 만일 사치를 지나치게 하고, 화려한 생활에 빠져서 스스로 돌이키지 못하면 어떻게 나라를 守護하겠소.”중손타가 부끄러워하면서 물러갔다.

15. 君子服善則益恭,細人服善則益倨

趙簡子乘弊車瘦馬,衣羖羊裘,其宰進諫曰:「車新則安,馬肥則往來疾,狐白之裘溫且輕。」簡子曰:「吾非不知也。吾聞之,君子服善則益恭,細人服善則益倨;我以自備,恐有細人之心也。傳曰:周公位尊愈卑,勝敵愈懼,家富愈儉,故周氏八百餘年,此之謂也。」

趙簡子가 여윈 말이 끄는 낡은 수레를 타고, 검은 숫양 가죽으로 지은 갖옷을 입으니, 그의 家臣諫言을 올렸다. “새 수레는 안전하고, 살찐 말은 빠르게 왕래하며, 흰 여우 갖옷은 따뜻하고도 가볍습니다.”

조간자가 말했다. “내가 그것을 모르는 게 아니다. 나는 들으니, 君子는 좋은 옷을 입으면 더욱 공손해지고, 小人은 좋은 옷을 입으면 더욱 거만해진다고 하였다. 나는 이것을 가지고 스스로 경계하여 대비하는 것이니, 이는 소인의 마음이 있을까 걱정해서이다.

周公은 지위가 높아질수록 더욱 겸양하시고, 적을 이기면 더욱 두려워하시며, 집안이 부유해지면 더욱 검소하셨다. 그러므로 나라가 800여 년 동안 이어졌다.’라 했으니, 이를 두고 이르는 말이다.

16. 惡聞嬉戲之游,罷其所治之民乎?

魯築郎囿,季平子欲速成,叔孫昭子曰:「安用其速成也?以虐其民,其可乎?無囿尚可乎,惡聞嬉戲之游,罷其所治之民乎?

나라가 郞邑苑囿를 조성할 적에 季平子가 빨리 완성하려고 하자 叔孫昭子가 말했다. “빨리 완성하여 뭐하시렵니까? 빨리 완성하려고백성들을 학대하는 것이 어찌 옳겠습니까. 원유가 없는 것이 오히려 옳을 것입니다. 즐겁게 노는 것 때문에 자기가 다스리는 백성을 피곤하게 한다는 말을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17. 古之君子,以儉為禮;今之君子,以汰易之

衛叔孫文子問於王孫夏曰:「吾先君之廟小,吾欲更之,可乎?」對曰:「古之君子,以儉為禮;今之君子,以汰易之。夫衛國雖貧,豈無文履一奇,以易十稷之繡哉?以為非禮也。」文子乃止。

나라 叔孫文子王孫夏에게 물었다. “우리 先君宗廟가 작아서 내가 고쳐서 크게 지으려는데 되겠는가?”

왕손하가 대답했다. “예전의 君子는 검소함을 禮制로 삼았는데, 지금의 군자는 사치로 바꾸는군요. 위나라가 가난하지만 어찌 文履 한 짝을 가지고 十稷의 수놓은 비단과 바꾸지 못하겠습니까. 종묘를 고쳐 짓는 것은 禮制에 맞지 않습니다.”숙손문자는 이내 중지하였다.

18. 無以美妾疑妻,無以聲樂妨政,無以姦情害公,無以貨利示下

晉文公合諸侯而盟曰:「吾聞國之昏,不由聲色,必由姦利好樂,聲色者,淫也;貪姦者,惑也,夫淫惑之國,不亡必殘。自今以來,無以美妾疑妻,無以聲樂妨政,無以姦情害公,無以貨利示下。其有之者,是謂伐其根素,流於華葉;若此者,有患無憂,有寇勿弭。不如言者盟示之。」於是君子聞之曰:「文公其知道乎?其不王者猶無佐也。」

晉 文公諸侯들과 회합하여 맹서하였다. “나는 들으니, 국가의 혼란은 聲樂女色에 빠지는 데서 연유하지 않으면 반드시 간사한 수법으로 이익을 취하는 데서 연유한다. 성악과 여색에 빠진 것은 淫佚한 행위이고, 간사한 이익을 탐하는 것은 미혹한 행위이니, 음일과 미혹에 빠진 나라는 멸망하지 않으면 반드시 衰殘하게 된다.

지금부터 이후로는 아름다운 妾 때문에 아내를 의심하지 말며, 성악에 빠져서 政事를 그르치지 말며, 간사한 마음으로 公正함을 방해하지 말며, 재물의 이익으로 아랫사람들을 인도하지 말라. 이런 행위가 있는 사람은, 곧 그 근본을 베어 없애고 꽃과 잎에 마음이 빠져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자는 환난이 있어도 함께 근심해주지 않고, 적군이 침입해도 함께 도와 종식시켜주지 않을 것이다. 만일 맹서한 말과 같이 하지 않는 자는, 盟約한 말을 가져다 보여줄 것이다.”

이때에 君子가 이 말을 듣고 말했다. “진 문공은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를 안 사람이다. 그가 이 되지 못한 것은 輔佐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19.醉而不出,是謂伐德。

晏子飲景公酒,日暮,公呼具火,晏子辭曰:「詩曰:『側牟之俄。』言失德也;『屢舞傞傞。』言失容也。『既醉以酒,既飽以德。』『既醉而出,並受其福。』賓主之禮也。『醉而不出,是謂伐德。』賓主之罪也。嬰已卜其日,未卜其夜。」公曰:「善。」舉酒而祭之,再拜而出,曰:「豈過我哉?吾託國於晏子也。以其家貧善寡人,不欲淫侈也,而況與寡人謀國乎?」

晏子景公을 청하여 술을 마시게 할 때 날이 저물자 경공은 술을 더 마시기 위해 사람을 불러 등불을 준비하라고 하였다.

안자가 거절하며 말했다. “詩經[]이 삐딱하게 기울었다.’ 하였으니, 이는 술에 취해 酒德을 잃었음을 말한 것이며, ‘그치지 않고 여러 차례 춤을 춘다.’ 하였으니, 이는 술에 취해 단정한 태도를 잃었음을 말한 것입니다. ‘이미 술에 취했고, 이미 恩德에 배가 부르네.’라 하고, ‘이미 취하고 자리를 떠나면, 함께 그 복을 받을 것인데.’라고 하였으니, 이는 손님과 주인 사이의 禮節을 말한 것입니다. 취하고도 자리를 떠나지 않으니, 이를 일러 德을 손상시키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손님의 잘못을 말한 것입니다. 저는 낮 동안 술 마시는 일을 예산하였지, 밤에까지 술 마시는 일은 예산하지 않았습니다.”

경공이 좋은 말이오.” 하고는 술잔을 들어 땅에 술을 붓고 두 번 절하고 나가면서 말했다. “내 어찌 잘못 보았으랴. 내가 안자에게 나라를 부탁하자, 그는 가난한 생활로 寡人을 잘 이끌어 지나치게 사치하게 하지 않았으니, 하물며 과인과 함께 나라 다스리는 일을 계획함이랴!”

20. 多送之以財寶,以奪生者財用

楊王孫病且死,令其子曰:「吾死欲裸葬,以返吾真,必無易吾意。」祁侯聞之,往諫曰:「竊聞王孫令葬必裸而入地,必若所聞,愚以為不可。令死人無知則已矣,若死有知也,是戮尸於地下也,將何以見先人?愚以為不可!」王孫曰:「吾將以矯世也。夫厚葬誠無益於死者,而世以相高,靡財殫幣而腐之於地下,或乃今日入而明日出,此真與暴骸於中野何異?且夫死者終生之化,而物之歸者;歸者得至,而化者得變,是物各返其真。其真冥冥,視之無形,聽之無聲,乃合道之情。夫飾外以誇眾,厚葬以矯真,使歸者不得至,化者不得變,是使物各失其然也。且吾聞之,精神者,天之有也,形骸者,地之有也;精神離形而各歸其真,故謂之鬼。鬼之為言歸也,其尸塊然獨處,豈有知哉?厚裹之以幣帛,多送之以財寶,以奪生者財用。古聖人緣人情,不忍其親,故為之制禮;今則越之,吾是以欲裸葬以矯之也。昔堯之葬者,空木為櫝,葛藟為緘;其穿地也,下不亂泉,上不泄臭。故聖人生易尚,死易葬,不加於無用,不損於無益,謂今費財而厚葬,死者不知,生者不得用,謬哉!可謂重惑矣。」祁侯曰:「善。」遂裸葬也。

楊王孫의 병이 위독하여 죽으려 할 적에 그 아들에게 분부하였다. “내가 죽거든 알몸으로 埋葬하여 본래의 자연 형태[]로 돌아가기를 원하니, 반드시 나의 뜻을 바꾸지 말아다오.”

祁侯가 이 소문을 듣고 가서 만류하였다. “내 듣건대 그대가 죽으면 매장할 때 반드시 알몸으로 땅에 묻어달라고 분부했다고 하는데, 내가 들은 말과 틀림없이 같다면 나는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죽은 사람이 아무것도 모른다면 그만이지만, 만일 죽은 사람도 아는 것이 있다면 이는 시체가 땅속에서 치욕을 당하게 하는 것이오. 그러니 장차 어떻게 先祖들을 뵙겠소. 나는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양왕손이 말했다. “나는 이것으로 세상 사람들의 잘못된 풍습을 바로잡아주려는 것이오. 厚葬은 진실로 죽은 이에게 아무 이익이 없는데 세상 사람들이 경쟁적으로 서로 높은 곳을 향하여 재물을 허비하고 돈을 다 써 땅속에서 썩게 하는 것이오. 때로는 오늘 묻었다가 내일 盜掘당하여 밖으로 나오면 이는 참으로 들 가운데에 시체[]를 버려서 뒹굴게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소또 죽음은 一生의 큰 변화요, 만물의 본원으로 회귀하는 것이오. 회귀하는 것은 돌아가고, 변화하는 것은 변화하면 이것이 바로 만물이 각각 그 본래의 자연 형태로 돌아가는 것이오. 그 본래의 자연 형태는 어둡고 아득하여 보아도 형체가 없고, 들어도 소리가 없으니, 이것이 곧 에 합치하는 情狀이오.

겉모습을 꾸며서 여러 사람들에게 과시하고, 후장하여 본래의 자연 형태를 막아서 회귀하는 것을 회귀하지 못하고, 변화하는 것을 변화하지 못하게 하면 이는 만물이 각각 그 자연의 형태를 잃게 하는 것이오. 또 나는 들으니, 정신은 하늘에 속해 있고, 형체는 땅에 속해 있으니, 정신이 형체를 떠나면 각각 그 본래의 자연 형태로 돌아가는 것이라오. 그러므로 이를 라 이르니, 의 뜻은 돌아간다[]는 말이오.

사람의 시체가 고독하게 홀로 땅속에 있으니 어찌 아는 것이 있겠소. 비단을 써서 두껍게 시체를 싸고 많은 재물을 써서 장례를 치러 보내면 이는 산 사람의 재물을 빼앗는 것이오. 聖人은 그 부모를 차마 그대로 보낼 수 없는 사람의 常情에 순응하였소. 그 때문에 喪禮를 제정하였는데, 지금 사람들은 그 예법을 뛰어넘으니, 내가 이 때문에 알몸으로 매장하여 세상의 풍속을 바로잡으려는 것이오.

옛날 帝堯의 장례에는 나무의 속을 텅 비게 파내어 을 만들고, 칡덩굴로 묶었으며, 묘의 구덩이를 팔 적에는 샘물이 나오는 곳까지 마구 파내려가지 않았고, 봉분은 냄새가 새어나오지 않을 정도만 쌓았지요. 그러므로 성인이 살았을 적에는 숭상을 받기 쉽고, 죽었을 적에는 장례를 치르기 쉬웠으니, 쓸데없는 것을 더 추가하지 않고, 무익한 것을 허비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지금 재물을 허비하면서 후장하여 죽은 사람은 이를 알지 못하고, 산 사람은 재물을 쓰지 못하니 잘못된 일이오. 이는 아주 어리석은 일이라 이를 만하다오.”기후가 좋은 말이오.” 하고는 마침내 양왕손이 죽은 뒤에알몸으로 매장하였다.

 

21. 吾非以饌為厚也,以其食美而思我親也

魯有儉者,瓦鬲煮食,食之而美,盛之土鈃之器,以進孔子。孔子受之,歡然而悅,如受太牢之饋。弟子曰:「瓦甂,陋器也;煮食,薄膳也。而先生何喜如此乎?」孔子曰:「吾聞好諫者思其君,食美者念其親,吾非以饌為厚也,以其食美而思我親也。」

나라에 검소한 사람이 있어서 瓦鬲으로 음식을 끓여 먹었는데, 먹어보니 맛이 좋자 이 음식을 土鉶에 담아 孔子께 드렸다. 공자는 이 음식을 받으시고 흔연히 즐거워하시어 마치 太牢의 음식을 선물로 받은 것처럼 여기셨다어떤 제자가 말했다. “瓦甂은 형편없는 그릇이고, 끓인 음식은 맛이 없는 음식입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어찌 이와 같이 즐거워하십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들으니, 諫言을 올리기 좋아하는 사람은 늘 자기 임금을 생각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사람은 늘 자기 부모를 생각한다고 하였다. 나는 이 음식이 맛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가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나를 생각했기 때문에 즐거워한 것이다.”

22.

晏子病將死,斷楹內書焉,謂其妻曰:「楹也,語子壯而視之!」及壯發書,書之言曰:「布帛不窮,窮不可飾;牛馬不窮,窮不可服;士不可窮,窮不可任。窮乎?窮乎?窮也!」

晏子이 깊어 죽으려고 할 때 기둥을 뚫어 遺言을 쓴 글을 넣어두고는 그의 아내에게 말했다. “기둥에 넣어둔 말은 아들이 장성하면 보여주시오.”

아들이 장성하여 유서를 꺼내보니, 다음과 같은 말을 써놓았다. “布帛이 결핍되면 안 되니 포백이 결핍되면 몸을 꾸밀 수 없고, 牛馬가 결핍되면 안 되니 우마가 결핍되면 부릴 수 없고, 선비가 결핍되면 안 되니 선비가 결핍되면 일을 맡길 수 없다. 위에 말한 것을결핍하겠느냐? 결핍하겠느냐? 그러면 참으로결핍되는 것이다.”

23. 說者流於者亂於辭,如此二者,則道不可委矣。

仲尼問老聃曰:「甚矣!道之於今難行也!吾比執道委質以當世之君,而不我受也。道之於今難行也。」老子曰:「夫說者流於者亂於辭,如此二者,則道不可委矣。

仲尼께서 老聃(노담, 老子)에게 물으셨다. “심하군요. 지금 세상에 를 행하기 어려움이 말이요! 내가 근래에 도를 가지고 당대의 임금에게 禮物을 바치며 시행하기를 요구했으나 나의 요구를 받아주지 않으니, 지금 세상에 도를 행하기 어렵군요.”

老子가 말했다. 말하는 사람은 자기의 말재주에 흘러 실패하고, 듣는 사람은 말에 혼란을 느끼니, 이와 같은 두 가지 원인이 있으면 도를 맡길 수가 없지요.

 

24. 父母求吾孝,兄弟求吾悌,朋友求吾信

子貢問子石:「子不學詩乎?」子石曰:「吾暇乎哉?父母求吾孝,兄弟求吾悌,朋友求吾信。吾暇乎哉?」子貢曰:「請投吾詩,以學於子。」

子貢子石에게 물었다. “그대는 詩經을 배우지 않았소?” 자석이 말했다. “내가 한가한 시간이 있나요? 모는 나에게 孝道를 요구하시고, 형제는 나에게 友愛를 요구하며, 벗은 나에게 信義를 요구하니, 내가 한가한 시간이 있나요?” 자공이 말했다. “나는 나의 詩經을 던져버리고 그대에게 배우기를 청하오.”

25. 參不及宣,其學而已

公明宣學於曾子,三年不讀書。曾子曰:「宣,而居參之門,三年不學,何也?」公明宣曰:「安敢不學?宣見夫子居宮庭,親在,叱吒之聲未嘗至於犬馬,宣說之,學而未能;宣見夫子之應賓客,恭儉而不懈惰,宣說之,學而未能;宣見夫子之居朝廷,嚴臨下而不毀傷,宣說之,學而未能。宣說此三者學而未能,宣安敢不學而居夫子之門乎?」曾子避席謝之曰:「參不及宣,其學而已。」

公明宣曾子에게 글을 배우되 3년 동안 글을 읽지 않자, 증자가 말했다. “! 네가 나의 門下에 있은 지 3년이건만 글을 배우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공명선이 말했다. “어찌 감히 배우지 않았겠습니까. 제가 선생님께서 뜰에 계실 때를 보니, 부모가 계시면 꾸짖는 소리가 개와 말에까지도 미치지 않으시기에 저는 이를 기뻐하여 배웠으나 아직 능하지 못합니다. 제가 선생님께서 손님을 응접하시는 것을 보니, 공손하고 儉朴하여 태만하지 않으시기에 저는 이를 기뻐하여 배웠으나 아직 능하지 못합니다. 제가 선생님께서 朝廷에 계시는 것을 보니, 아랫사람을 엄격히 대하면서도 傷害하지 않으시기에 저는 이를 기뻐하여 배웠으나 아직 능하지 못합니다. 제가 선생님의 이 세 가지를 기뻐하여 배웠으나 아직 능하지 못하니, 제가 어찌 감히 배우지 않으면서 선생님의 문하에 있겠습니까.”

증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사과하여 말했다. “나는 너에게 미치지 못하니, 그저 글만 배웠을 뿐이구나!”

26. **

魯人身善織屨,妻善織縞,而徙於越。或謂之曰:「子必窮!」魯人曰:「何也?」曰:「屨為履,縞為冠也,而越人徒跣剪髮,遊不用之國,欲無窮得乎?」

나라 사람이 자신은 신을 잘 삼고, 아내는 흰 비단을 잘 짰는데, 나라로 옮겨가 살려고 하였다. 어떤 이가 말했다. “그대는 반드시 곤궁해질 것이다.” 노나라 사람이 말했다. “어째서 그렇지요?”

그 사람이 대답했다. “신은 발에 신는 것이고, 흰 비단은 을 만드는 것이오. 월나라 사람은 맨발로 다니고 머리는 짧게 깎고 사는데, 그대가 이 두 가지를 쓰지 않는 나라에 가려 하니, 곤궁하지 않으려고 한들 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