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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주태후 허황옥 이야기

by 변리사 허성원 2017. 5. 29.
[** 보주태후 허황옥에 관하여 김병모의 교수의 글을 밴드에서 접하였다. 찬찬히 읽어 보고 싶어 원본의 소재를 찾았으나 입수할 수가 없어 여기에 밴드 글을 그대로 옮겨 싣는다. 3번으로 나뉘어 있는 글을 모두 옮겼다.]


김병모의 고고학여행 최종회 ⑧(1/3), 허황옥은 중국 사천성을 거쳐 김해로 들어왔다

능비陵碑의「普州太后」를 추적하니 바빌로니아-페르시아-인도-중국-김해로 이어지는 민족이동의 한 줄기가 잡혔다.

왜 普州太后인가
<許氏族의 源流를 밝혀 주는 後漢 때의 金石文「神井記」. 국내 최초 공개이다.「普州」,「許女黃玉」등의 글자가 보인다.>

서기 48년에 가락국에 도착한 許黃玉(허황옥)은 인도의 阿踰馱國(아유타국) 출신의 공주 신분이라고 「삼국유사」가 전하고 있다. 김수로왕과 결혼한 그 여인이 낳은 후손들이 김해 金氏와 김해 許氏가 되었고, 여기서 파생해 나간 인천 李氏 등이 합하여 현대 한국 인구 중 최대의 성씨로 발전하였다. 따라서 許黃玉은 자타가 공인할 만큼 한국인의 뿌리 형성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치부되어 있다. 이 여인의 출신지에 대하여는 인도의 갠지스江 유역에 있는 역사도시 아요디아(Ayodhia)인 듯하다고 학자들의 견해가 모아지고 있다. 게다가 가락국의 國章格(국장격)인 물고기 두 마리가 마주 보는 神魚像(신어상)이 수로왕릉에도 여러 개 그려져 있지만, 아요디아에도 수백 개의 힌두교 사원의 정문마다 그려져 있어서 아요디아와 김해, 아유타국과 가락국의 어떤 문화적인 연결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두 지역을 잇는 중심인물인 許黃玉 여인의 정확한 출신지에 대하여 어떤 암시를 하고 있는 유적이 지금 김해市에 있는 許黃玉의 능비이다.
여기에 다음과 같은 비문이 새겨져 있다.

駕洛國 首露王妃 普州太后 許氏陵

이 비석은 조선시대에 세워진 것인데 음각되어 있는 글씨들의 字體(자체)가 뚜렷하여 판독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 비문에서 의미를 알 수 없는 것은 「普州太后(보주태후)」라는 부분이다. 왕비였던 여인의 시호로서 왜 「普州(보주)」라는 단어가 등장하였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분명히 그 여인의 후손들이 의논하여 왕비로서의 품격에 걸맞은 시호를 결정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왜 普州太后인가? 한국 고대사에서 왕의 부인들은 시호가 없거나 있을 경우 대개 ○○부인이다. 예컨대 신라 박혁거세의 왕비는 閼英夫人(알영부인)이고, 석탈해의 왕비는 阿孝夫人(아효부인)이다. 가락국이 가야로 발전하면서 계승된 후대 왕들의 왕비들 중 아무도 「○○태후」라는 시호가 없는데 유독 許黃玉에게만 시호로서 普州太后라는 타이틀이 주어진 사실은 매우 이례적이면서도 흥미 있는 내용이다. 어쩌면 許黃玉 시대에는 시호라는 것이 없다가 후손들이 조상 할머니의 출신과 생전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普州라는 시호를 주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해도 기왕에 출신지를 기념한다면 그녀의 출신국인 「아유타국 태후」라고 해야 마땅할 터이다. 고려 공민왕의 妃(비)를 魯國公主(노국공주)라고 불렀던 역사적 기록도 있고 해서 수로왕비의 시호에 「땅」이라는 의미의 「州(주)」자가 포함된 普州太后는 더더욱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가야史를 전공하는 역사학자들이나 그 여인의 후손들인 김해 金씨나 김해 許씨 문중 출신 어느 누구도 이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지 않고 수백 년, 정확하게 말한다면 거의 2000년이 흘러가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매년 봄·가을이면 김해에 답사여행으로 찾아오는 수천 명의 각급 학생들과 선생님들의 눈에도 분명히 普州太后라는 커다란 글씨가 보였을 터인데도 어느 누구도 의문을 가져 본 사람이 없는 듯하였다.

나도 처음에는 「普州」가 그 여인의 고향인 인도 아유타의 어느 한 마을쯤으로 짐작하고 인도에서 구입한 지도를 여러 개 꺼내 놓고 普州를 찾아보려고 하였다. 인도의 지도들은 모두 영어로 인쇄되어 있다. 따라서 普州라고 발음될 수 있는 지명을 찾느라고 많은 시간을 낭비하였지만 헛수고였다.


보주普州는 중국 안악현安岳縣의 옛 이름

普州는 의외로 가까운 데 숨어 있었다.

「中國故地名辭典」에서 찾아낸 普州는 四川省(사천성) 安岳縣(안악현)의 옛 이름이었다. 周(주)나라 때부터 宋(송)나라 때까지 普州라고 불렸다. 그렇다면 許黃玉의 시대인 後漢(후한) 때는 바로 普州라고 불리던 때 아닌가?

그렇다면 許黃玉 왕비의 시호로서의 普州와 後漢의 지명으로서의 普州는 아무 관계가 없이 우연히 글자만 똑같다는 말인가. 이런 의문이 떠오르자 나는 묘한 사건에 연루되어 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後漢 때의 四川省 지방은 오늘날 重慶을 중심으로는 巴(파)이고 成都를 중심으로는 蜀(촉)땅이 있었다. 동쪽으로 南郡(남군)과 경계를 삼고 있었다.

우선 나는 당시의 역사를 기록한 「後漢書」를 들췄다. 許黃玉의 한국 도착 때인 서기 1세기에 해당되는 부분을 찾아 천천히 읽어 나갔다.

後漢 光武帝(광무제) 건무 23년(서기 47년) 南郡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토착민들이 봉기하여 漢나라 정부에 대항하였다. 반란군의 세력이 강하여 정부는 진압군을 파견해 힘겹게 진압하였다. 반란군을 일으킨 토착인구 7000명을 江夏(강하·현재 武昌 지방)로 이주시켰다.

서기 47년이면 許黃玉의 가락국 도착 사건보다 꼭 1년 전이다. 南郡이면 양자강 중류지방이다. 당시의 普州 땅과는 아주 가까운 거리이다. 거기서 반란사건이 일어났다면 普州에 살고 있던 사람들도 정치적인 소용돌이에서 자유롭지 못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묘한 사건을 우연히 목격하게 된 증인처럼 나는 이 문제에 계속 빠져 들어갔다. 「後漢書」를 계속 읽어 나갔다.

<後漢 和帝(화제) 永元(영원)13년(서기 101년) 이 지역에서 또 반란이 일어났다. 許聖(허성)의 무리가 세금의 차별이 있는 것에 원한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다음해 여름, 정부는 사자를 파견하여 荊州(형주) 여러 郡의 1만여 병력을 동원하여 반란군을 토벌하였다. (중략) 許聖 일당을 크게 격파하였더니 許聖의 무리가 항복하였다. 이들을 또다시 江夏로 이주시켰다>

『和帝 永元 十三年, 許聖等 以郡收稅不均, 懷怨恨 遂屯聚反叛 明年夏, 遣使者 督荊諸郡 兵萬餘人 討之. (중략) 大破聖等, 聖等乞降, 復徙置江夏…』

이 두 번에 걸친 사건들의 내용들을 종합하면 許黃玉이 왜 普州太后라고 불리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매우 중요한 단서를 추출할 수 있었다. 南郡은 普州와 인접해 있는 땅이어서 南郡에서 수천 명이 연루된 반란사건이 있었다면 가까운 普州에 그 불똥이 튀지 않을 수 없었을 터였다. 두 번째 사건에서는 반란을 주동했던 인물로 許聖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즉 許씨 성을 가진 사람이 普州에서 일어난 정치적 사건의 중심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건 매우 중요한 내용이었다. 普州와 관련된 지역에 許씨가 지도층 인물로 살고 있었고, 정치적 사건의 결과로 수천 명의 인구가 두 번씩이나 양자강 하류인 武昌지방으로 강제 이주당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만약에 47년 반란사건 때 고향을 떠난 7000명 중에 許씨 성을 가진 15세의 소녀가 섞여 있었다면 다음해에 양자강을 타고 황해로 나와 가락국에 도착할 수도 있는 가능성이 성립된다.

한국 측의 기록인 「삼국유사」와 중국 측의 기록인 「後漢書」의 내용을 종합하면 양자강 상류의 普州 땅에 살고 있던 세력인 許氏族들이 後漢 정부의 차별 대우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한 사건이 있었고, 후에 許氏族 출신 한 소녀가 황해를 건너 가락국에 도착하는 일련의 사건이 시간의 톱니바퀴처럼 꼭 맞아 돌아가는 것으로 추리된다.

나는 미궁에 빠진 사건을 다시 꺼내 수사해야 하는 사람의 심정이 되었다. 수사는 누가 시켜서 하지 나는 누가 시키지도, 해결한다고 해도 누가 칭찬도 하지 않을 사건을 추적하고 있는 기분에 빠졌다. 그래도 사건해결의 기미가 보이니까 아주 재미있어졌다.

許氏族은 司祭였다

이어서 계속되는 「後漢書」의 기록에서 점점 더 흥미 있는 내용이 나타났다.

許聖의 許(허)는 성씨가 아니고 세습되는 직업 신앙인(巫師)이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 직업 巫師(무사)는 그 사회에서 존경받는 신분이었다고 한다. 신앙인의 직분을 세습하는 종교란 무엇일까. 중국역사책에 표현된 「巫師」는 중국인의 유교적 기준으로 본 다른 민족의 종교 지도자를 일컫는 표현일 것은 분명하였다. 그렇다면 시베리아 샤먼처럼 世襲巫(세습무)일 수도 있을 것이고, 인도의 브라만일 수도 있다. 계급이 세습되고, 특히 신앙 지도자의 계급이 세습되는 사회는 인도의 힌두교 사회뿐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면서 「삼국유사」를 자세하게 읽어 보면 가락국에 許黃玉도 두 아들에게 許씨 성을 賜姓(사성)하지 않았나. 「後漢書」의 설명대로 「許」라는 말이 직업 巫師라면 許씨를 사성하였다는 것은 직분 내지는 계급을 세습시켰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許氏族은 사제계급이었다는 말이 된다. 이 대목은 한국 고대사회를 해석하는 데 아주 중요한 내용을 시사하고 있어서 따로 깊은 연구가 필요하여 여기서는 일단 접어 놓겠다. 다만 김해 신어산 은하사 현판에 있는 기록 하나를 소개한다.

은하사는 본래 西林寺(서림사)였다. 서림사를 창건한 인물은 長遊和尙(장유화상)인데 許后(許黃玉)의 오빠다.

한국사에서 許씨 성을 가진 최초의 남자는 長遊和尙이고 직분은 승려라는 내용이다. 불교는 힌두교 사회인 인도에서 시작된 철학세계이고, 서력기원 1세기 전반에는 아직 중국에도 불교가 도입되기 전인데 한국 가락국에 승려가 도착하여 절을 창건하였다는 내용이다. 이 현판 내용의 진위를 떠나서 한국에 불교가 언제 도입되었느냐를 암시하는 내용이므로 중요한 연구 테마가 또 하나 생겨났다고 볼 수 있다. 長遊和尙은 許黃玉과 함께 가락국에 와서 許后가 낳은 아들 7명을 가르쳐 득도하게 한 인물로 그 전설은 지금 하동군 화개면 七佛寺(칠불사)에 잘 전해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後漢書」의 기록대로 「許」는 세습되는 직업무사라는 내용이 더욱 설득력이 있다.

그래서 나는 직접 普州를 답사해 보지 않고는 앞으로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普州는 나에게 쉽게 문을 열지 않았다. 1990년 몽골에서 귀국하는 길에 시도한 普州 탐사계획은 北京(북경)에서 무산되었다. 上海(상해)나 成都(성도) 같은 대도시까지는 외국인들의 여행이 허가되었지만, 安岳 같은 시골 도시는 외국인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을 때였다. 나는 만만디(漫漫的)의 중국 정부와 지구전을 펼쳤지만, 그냥 아쉽게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普州가 나에게 문을 열 날을 기다렸다.

다음해 여름 행운이 찾아왔다. 西安에 있는 국립 陝西省(섬서성)박물관이 새롭게 개관하는 행사에 초대되었기 때문이었다. 행사에 함께 갔던 한병삼씨와 이종선 씨는 행사 참가 후 귀국길에 오르고, 나는 무조건 成都로 내려갔다. 이번에야 말로 普州에 찾아 들어가서 끝장을 봐야 했기 때문이었다.

계속 ~~~~

김병모의 고고학여행 최종회 ⑧(2/3), 허황옥은 중국 사천성을 거쳐 김해로 들어왔다

새들도 울고 넘는 蜀道를 지나…

西安을 떠난 프로펠라 비행기가 晋嶺(진령)이 손에 닿을 듯이 겨우겨우 넘어 「三國志演義(삼국지연의)」에 나오는 「蜀道(촉도)」 위를 지나 成都에 도착하였다. 중국 땅에서 西安-北京으로 이어지는 북쪽의 황하 水系와 남쪽의 양자강 水系는 별개의 환경이다. 북쪽은 사막처럼 평지에 먼지가 많고, 남쪽은 산과 강으로 이루어진 천혜의 농경지대이다.
<황하강의 발원지는 곤륜산맥, 양자강의 발원지는 티베트고원의 탕구라산맥이라고 하네요>

成都를 중심으로 하는 四川(쓰촨성)지방은 秦(진)나라의 통일 이전에는 중국 땅도 아니었다. 양자강 상류의 한 경제 단위로서 역사에서는 蜀(촉)으로 알려져 있던 중국사에서의 변방이었다. 西漢(즉 前漢 BC 202~AD 8) 기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益州(익주)라는 행정구역 서쪽 끝에 끼어들어 중국사에 있어 일부분이 되기 시작하였다. 그때까지 蜀 땅은 변변한 나라도 아닌 고대국가 이전 단계의 首長(수장)사회였던 것 같다.
<청두는 쓰촨성(四川省)의 성도(成都)로, 현지에서는 '청뚜'라고 발음한다.>

成都에 도착하기 전부터 이번 해부터는 安岳縣까지 외국인의 여행이 가능하다는 전갈을 받았지만, 지방에 가면 무슨 불의의 장애가 나타날지 모르니까 미리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오래 전부터 국제회의 때마다 중국대표로 참가하여 나와 잘 알게 된 문물국의 羅哲文(나철문) 선생께 부탁하여 四川省의 역사학자 몇 사람을 만날 수 있도록 수배해 놓고, 혹시나 아주 시골 마을까지 가야 할 경우를 생각하여 현지의 조선족 안내인과 전용차량을 준비시키고 成都에 도착하였다.

成都에서 역사학자인 高文(고문) 선생을 만나 내가 安岳에 가야 할 이유를 설명하였다. 許聖의 반란사건과 혹시 神魚像이 成都의 박물관이나 安岳지역에서 고고학 유물로 남아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한 시간 넘게 설명하였다. 高文 선생으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이고, 통역하던 이천석씨도 전혀 모르는 내용이라서 설명과 통역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先답사·後계획 세우는 연구방법

중국사에는 단 한 줄도 남아 있지 않은 역사 속의 어느 한 여자의 흔적을 찾는다고 四川까지 찾아온 한국 출신 고고학자의 이야기를 듣던 高文 선생은 측은한 표정으로 몇 가지 참고할 사항을 알려 주었다. 安岳에 가면 安岳縣志(안악현지) 편찬위원회가 있으니까 찾아가 보라는 내용이었다.

미리 그곳에 전화를 하여 漢나라 시대 安岳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을 섭외하고자 하였으나 그건 다 배부른 부르주아들의 생각이란다. 安岳縣志 편찬위원회에 무슨 전화가 있을 것이며, 그 시골에서 安岳의 地方史(지방사)는커녕 역사학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것 같지도 않다는 의견이었다. 四川 아니 蜀나라의 수도인 成都의 지식인들은 安岳 따위의 시골은 아예 무시하고 있는 듯하였다.

다음날 아침 나는 安岳을 향해 떠났다. 나는 아프리카를 탐사한 리빙스턴처럼 무조건 安岳을 향해 들어갔다. 더 이상 成都 여관에 앉아서 한가하게 정보를 수집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는 지구상의 어느 지역이 연구선상에 떠오르면 문제의 지역을 우선 답사하고 나서 다음 계획을 수립하는 것이 나의 연구방법이다. 1980년대에도 아시아의 고인돌 문화의 확산과정을 연구할 때, 인도와 한국 사이에 넓고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는 인도네시아의 群島(군도)들을 4회에 걸쳐 답사하고 나서, 아시아 고인돌의 분포도를 그릴 수 있지 않았던가. 비록 그 방법이 힘들고 비용이 많이 들지만 시간을 단축한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지난 25년간 운이 좋아서 학회 일로 또는 정부 일로 여러 나라를 다닐 수 있어서, 그때마다 미리 생각해 두었던 여러 곳의 「문제 지역」을 답사하곤 하였다.

安岳의 옛날 이름이 普州이고 나의 조상 할머니인 수로왕비 許黃玉의 시호가 普州太后이다. 그 내용 하나만으로도 내가 安岳 땅을 답사해 볼 충분한 이유가 된다. 게다가 이 지역에서 許黃玉의 생존기간 중인 서기 47년에 반란사건이 일어나 7000명이 추방되었고, 그 후에 반란세력의 주동자로 許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밝혀 낼 수 있었기에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다. 여기서 나는 혹시라도 지금까지 살고 있는 許씨의 후손을 만날 수 있다면 다행한 일이고, 許씨들이 後漢 이후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도 만나게 된다면 커다란 행운이라고 생각하며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범을 잡으려면 虎窟(호굴) 속에 들어가야 한다는 말처럼 자동차로 비포장도로를 따라 네 시간 넘게 걸려 安岳으로 들어갔다. 安岳은 북위 30도 선상에 있다. 上海보다도 더 남쪽이니 6월의 날씨가 더울 것은 짐작하였지만 차창을 통해 들어오는 후끈한 열기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뜨거웠다.

오리떼가 노니는 許씨 集姓村, 許家鴨原

安岳은 成都와 重慶(중경)의 중간에 있는 내륙지방 한가운데 있는 농촌이었다. 오후 2시쯤 도착하여 차에서 내리려니까 찜통 같은 더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내에는 사람의 인기척이 드물었다. 너무 더워서 사람도 동물도 모두 쉬고 있는 시간인 듯하였다. 이탈리아나 스페인의 여름 낮처럼 사람들은 낮잠을 자고 있는 듯 시내의 길들이 텅 비어 있었다. 강렬한 햇볕만이 도로를 달구고 있었다.

이곳이 옛날에 普州였다는 흔적이 시내 여기저기에 남아 있었다. 「普州賓館」, 「普州 照像館(조상관·사진관)」 등. 우선 招待所(초대소)에 짐을 내리고 安岳縣志 편찬위원회를 찾아갔다. 사무실에는 러닝셔츠 바람으로 낮잠을 즐기던 60代 村老 한 사람이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그 사람을 상대로 우리는 탐문을 시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漢나라 때 許聖의 반란사건이나, 내가 제시하는 김해 수로왕릉의 神魚像 사진과 비슷한 것도 보지 못하였다고 한다. 사무실은 참고도서 한 권도 없는 위원회였다. 하얀 바탕에 검은색으로 크게 써 붙인 사무실 간판과는 전혀 어울리지도 않았다. 인류학 현지 조사에서 성공하려면 제일 중요한 것이 좋은 정보 제공자를 만나는 일인데, 나는 첫 번째 시도에서 운이 따르지 않았음을 느꼈다. 그래도 나는 두어 시간을 보내며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으로 그날의 유일한 「인포만테(정보 제공자)」인 노인과 대화를 시도하였다.

집요한 질문 끝에 安岳 시내에 許씨 성을 가진 사람이 몇 사람 살고 있다는 정보를 얻어 내게 되었다. 초대소에 들어온 우리는 여기저기 전화를 걸고, 사람을 보내고 하여 어렵사리 許彪炳(허표병)이라는 사람을 수배할 수 있었다. 밤 10시가 넘어서 만나게 된 許彪炳씨는 중학교 교장선생님이었다. 나의 오랜 설명을 듣고 나더니 자기가 태어난 고향으로 안내해 주겠다고 하였다. 그곳까지 가는 길은 험해서 자기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고 삼촌이 길을 안내해 주도록 알아보겠다고 약속하고 헤어졌다.

다음날 오전 6시에 만난 우리는 民主鄕(민주향)이라는 許氏族 마을을 향해 떠났다. 짙은 안개를 뚫고 張河(장하)라는 마을까지 가서 타고 간 지프차를 버리고 거기서부터 산골길을 한 시간 가량 걸어갔다. 나의 눈앞에 나타난 마을의 옛날 이름은 許家鴨原(허가압원)이었다고 하였다. 「오리떼가 노니는 許씨들의 마을」이라는 詩的인 명칭이었다. 낮은 산을 등지고 여러 개의 강줄기 사이에서 40여 호의 인구가 논밭을 일구며 살고 있었다. 전형적인 시골 마을로 달구지 하나 변변하게 다닐 길도 없는 시골 농촌이었다. 6월의 논에서는 벼가 탐스럽게 자라고 있었다. 동네 이름대로 강가에 오리들이 한가롭게 떠 있고, 한국 농촌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던 누렁 소가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풍경이 정지용의 詩 「향수」를 읊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하였다.

普州에 살고 있는 許氏族

한 농가를 지나가며 그 안을 기웃거려 보니 대문 안으로 디딜방아가 걸려 있었다. 중국어로 디딜방아가 무어냐고 물으니 이천석씨가 踊米(용미)라고 적어 주었다. 「쌀을 춤추게 한다」는 뜻인 모양이다. 이런 곳에서 살던 사람이 고향을 떠나 한국의 어느 농촌으로 이사를 간다고 해도 생활방식은 전혀 바꿀 필요 없이 살아갈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마을 중심으로 걸어 들어갔다. 許교장의 삼촌이 어느 한 집으로 들어가더니 40代 남자 한 사람을 데리고 나왔다. 촌장의 아들인 許太恂(허태순)이라고 하였다.

40代의 許太恂씨가 안내한 곳은 사당이 무너진 페허였다. 벽돌과 기왓장이 어지럽게 쌓여 있는 사이로 나무가 사람 키를 훌쩍 넘겨 자라 있었다. 許氏族의 사당이라고 하였다. 1960년대 불어닥친 문화혁명 기간 중에 紅衛兵(홍위병)들에 의하여 파괴되었다고 한다.

紅衛兵. 한국전(중국식으로는 조선전쟁)에 참가하느라고 기진맥진하던 중국을 다스려야 했던 毛澤東(모택동)이 경제불안 등의 내부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문화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지식인들을 숙청하였는데, 이때 전위대로 앞세운 것이 바로 10代의 소년들로 구성된 홍위병들이다.

홍위병들의 狂氣는 사당을 불태우는 데 그치지 않고 마을 뒤 許씨 宗山에 묻혀 있는 조상들의 무덤에서 비석들까지 모두 뽑아서 강물 속에 던져 버렸다고 한다. 각 지역에서 살고 있는 씨족들의 세력을 뿌리째 뽑아 버리려는 의도였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씨족의 구성원 중에 평소에 사상적으로 의심받던 사람들과 젊은이들을 강제로 이주시켜 그들은 할 수 없이 湖南省(호남성)·廣東省(광동성)으로 쫓겨가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하면 야만적인 처사이지만 당시에 중국인들은 秦始皇(진시황) 때의 焚書坑儒(분서갱유) 사건을 떠올리며 참고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6·25 때 인민군 치하에서 붉은 완장을 두른 사람들이 수많은 양민을 무참하게 죽이지 않았나.

세월이 흐른 후에 중국의 지식인들 중에 죽도록 고생하다가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홍위병의 만행은 바깥세상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심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許교장이 왜 자신의 고향을 한 번도 찾지 못했었는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許교장은 소위 배운 자, 즉 지식분자 아닌가. 하마터면 정치광풍에 휩싸여 역사 속에서 의미 없이 사라질 뻔한 사람 중에 하나였을 것이다. 정치가 무엇이며 이념이 무엇인지.

광기 어린 세월이 지나고 나서도 한참 후에야 쫓겨났던 사람들이 하나 둘 고향으로 돌아오고, 남아 있던 노약자들과 함께 버려졌던 비석들을 찾아다가 제자리에 놓았는데, 똑바로 세워 놓지 않고 모두 엎어 놓았다. 그 이유인즉 언제 또 문화혁명 같은 광풍이 몰아칠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중 한 개를 세워서 이름을 읽어 보니 許應鳳이었다. 기록 삼아 사진을 한 장 찍으려 하니 許太恂씨가 펄쩍 뛰며 말리는 것이다. 중국은 그때까지도 공포의 분위기였다.

한바탕의 미친 바람 紅衛兵의 亂行
이곳은 許씨들의 종산으로 수십 기의 許씨 묘들이 산등성이를 따라 줄지어 있었다. 정치적인 문제들만 없었다면 누가 보아도 평화롭기 그지없는 농촌마을이었다. 불과 30년 전에 혁명이라는 一陣狂風(일진광풍)이 몰아쳤던 곳이라고 생각할 수 없게 지극히 안정된 농촌 풍경이었다. 그러나 이곳의 許氏族들은 2000년 전에도 漢나라의 차별정책 때문에 심한 박해를 받고 7000명이나 되는 인구가 고향에서 강제로 추방된 적이 있는데, 20세기 말에 또 이념의 희생양이 되어 죽고 추방되는 비극이 되풀이된 것이다. 왜 비극은 반복되고 있는지 모를 일이라고 속으로 한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民主鄕의 방문으로 나는 일단 安岳縣 내에 許씨들의 집성촌이 여러 개 존재한다는 중요한 정보를 얻게 되었다. 許씨 마을에서 오래 머물면서 村老들을 만나 지나간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나는 떠나야 했다. 숙소도, 식당도, 하다못해 구멍가게 하나도 없는 글자 그대로 僻地(벽지) 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오전 6시에 安岳 시내를 떠나 오전 10시가 넘도록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였다. 도중에 가게나 인가가 하나도 없는 산골길을 왔기 때문이었다.

새벽에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웠던 안개가 걷히니까 그 유명한 南중국의 뜨거운 태양이 열기를 쏟아붓기 시작하였다. 내가 사당 앞에서 許씨들과 이야기하고 있을 때, 마을 사람들과 어린이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모습을 관찰하니 황하를 중심으로 살고 있는 北중국인들과는 인상이 달랐다. 우선 키가 조금 작고 피부색이 약간 검었다. 눈이 커서 윤곽이 뚜렷하였다. 어른과 아이들에게 부탁하여 무너진 사당 앞에서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때쯤 나는 갈증과 땀 때문에 더 이상 햇볕 아래 서 있을 수 없었다. 눈이 부시고 탈수 증상이 느껴지면서 어지러워졌다. 許太恂씨와 대강 인사를 마치고 강원도의 비탈길 같은 산길을 다시 걸어서 張河로 돌아왔는데, 피곤하여 무슨 정신으로 걸었는지 생각도 나지 않는다.

다음날 찾은 成都의 박물관에는 神魚像이 하나 있었다. 청동제 祭器(제기)의 밑바닥에 물고기 두 마리가 마주 보는 그림이 陽刻(양각)되어 있었다. 神魚像들은 雲南省(운남성)의 漢代의 사당에 사용된 벽돌에서도 보였고, 양자강 중류 武昌에서 발견된 그릇 바닥에도 새겨져 있었다. 황하 지방의 박물관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던 물고기 조각들이 양자강 유역을 따라 漢나라 때의 유적에서 속속 나타났다.

나의 普州 방문은 상당한 소득이 있었던 셈이었다. 여름보다 다른 계절을 택하였어야 좋았을 것이라는 경험이 쌓인 셈이고 安岳 지방 출신 高학력 인사들과의 네트워크가 필요하였다.

귀국하여 한국과 인도 등지의 神魚像과 普州太后를 추적한 그동안의 이야기를 정리하여 「김수로왕비 許黃玉」(조선일보 1995)을 출간하였다. 그 책을 成都에서 나를 도와준 외사처 부처장 박명실 여사와 안내해 준 이천석씨에게 한 권씩 보내서 四川에서 신세진 것에 대하여 마음속으로 보답하였다.


김병모의 고고학여행⑦(3/3), 두 마리의 물고기, 그 의미를 찾아 헤맨 40년

숙명적 해후에 화가 났다


나는 다음날 독일로 날아갔다. 냉전 시대의 상징인 베를린 장벽은 관광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東베를린 지역에 페르가몬 박물관이 있었다. 거기에 내가 평생을 바쳐 만나려고 노력했던 마음속의 연인이 있었다. 돌로 만든 神魚像이 있었다.

거대한 석제 水槽(수조)의 외벽에 양각으로 새겨진 神魚像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상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아서 이름도 뜻도 모른 채 神魚像이 수십 년 동안 사회주의 국가였던 동독의 한 박물관에서 자기를 찾고 있는 지구상의 단 한사람인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神魚像이 새겨 있는 수조는 바빌로니아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바빌로니아의 왕이었던 센나게립王이 세운 궁전 중앙에 있던 신앙용 聖水를 담는 거대한 물통이었다. 여러 조각으로 부서진 것을 복원한 것이었지만 조각은 선명하였다.

神魚像은 바빌로니아 사람들의 어떤 신앙의 상징이었다. 기원전 8세기부터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신전 대문 위나 聖水용 수조에 조각하였다. 그들의 主神은 오아네스(Oaness·水神)이고 그 神을 물고기 모양의 옷을 입은 두 명의 남자 司祭가 양쪽에서 보호하고 있었다. 사제는 바빌로니아式 사각형 수염을 기르고, 왼손에는 물통을 들고 오른손에는 부채 같은 기구를 들고 主神을 향하여 물을 뿌리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사제들이 입고 있는 복장은 물고기의 껍질을 뒤집어쓴 것처럼 위로는 머리, 아래쪽으로는 물고기의 꼬리가 드리워져 있었다. 물고기의 비늘도 선명하게 선각되어 있었다.

한국의 神魚像은 두 마리의 물고기가 평행으로 마주하고 있고, 아요디아의 神魚는 45도 정도로 일어선 채 마주보고 있는 데 비하여, 바빌로니아의 神魚는 사람처럼 일어선 채 마주보고 있는 차이가 있었다. 모두 페르시아의 가라에서 기원한 것임이 분명하였다.

나는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박물관에서 유물을 촬영하려면 큐레이터의 허가가 있어야 하지만 나는 그런 국제적 예의를 무시하였다. 유물이 너무 중요하였고, 훌륭한 만큼 나는 화가 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좋은 유물을 갖고 있으면서도 동독 정부, 아니 페르가몬 박물관은 실패로 끝난 사회주의인가 무엇인가를 실험하느라고 나라의 문을 꼭 잠그고 비용이 없어서 수십 년간 박물관 소장품 圖錄(도록)조차 출판하지 못하였다. 그러니 동독이 서독과 합치지 않았다면 나 같은 바깥세상의 연구자들은 이런 중요한 유물을 보지도 못한 채 평생을 허송할 뻔하였다.

다행히 나의 무례한 행동은 아무도 보지 못하였다.

나는 神魚들을 애인의 얼굴처럼 쓰다듬으며 수십 년 만에 이루어진 우리의 숙명적인 해후에 감격하였다.

페르시아 신화 속의 「가라」가 加羅

神魚의 의미에 대한 나의 관심은 1960년대에 시작되었으니까 40년이 훌쩍 지나갔다.

이 21세기로 접어든 어느 날 새로 구입한 페르시아 신화 한국어 판을 읽게 되었다.

인류의 만병을 고치는 영약이 있었다. 그 약은 「고케레나」라고 부르는 나무의 열매였다. 고케레나는 바다 속에서 자라는 나무였다. 인류를 파멸시키는 惡神(악신)이 나무의 뿌리를 파 버리려고 두꺼비를 파견하였지만 실패하였다. 알고 보니 나무 뿌리를 지키고 있는 「두 마리의 神通한 물고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물고기의 이름이 가라(Kara)이다. 가라가 지성으로 보호하여 고케레나 나무가 잘 자라났고 그 열매와 잎새를 먹고 인류가 멸망하지 않고 번창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가라」가 바로 내가 필생을 바쳐 추적해 온 「神魚」아닌가? 아요디아의 마치 설화와 유사한 내용이었다. 이 대목에서 내가 또 한 번 놀란 것은 페르시아 신화의 「가라」는 가락국의 별칭인 加羅(가라·Kara)와 똑같은 발음이라는 점이다. 페르시아에서는 인류를 살리는 靈藥(영약)을 내는 神木을 보호하는 물고기의 명칭이 한국 역사에서는 국명이 되었단 말인가? 과연 이런 추리가 가능한가. 그렇다면 가락국은 신어국 아닌가.

그렇다. 페르시아와 가락국, 이란과 한국의 시공을 뛰어넘는 문화의 동질성은 이렇게 뚜렷하니 쉽게 부정해 버리면 연구자의 태도가 아니다. 같은 시대에 신라고분에서는 페르시아 제품인 유리 술잔과 寶劍(보검)이 심심찮게 출토되고 있는 고고학적 증거가 있음도 떠오른다.

나의 神魚연구는 끝없는 길을 가고 있었다. 한 고개를 넘어가면 또 다른 준령이 내 앞을 가로막는 느낌이었다.

결국 나는 구약성서 속에서 「魚門(어문·Fish Gate)」이라는 단어를 찾게 된다. 魚門은 바빌로니아의 어느 종족이 神殿을 세우고 그 대문에 물고기 모양을 새겨 놓았다는 내용이었다.

고고학적 증거와 신화와 성경의 내용이 일치하는 순간이었다. 오래 추적한 보람이 있었다.

페르시아는 옛날부터 정치적으로 바빌로니아와 대립하면서 자라났다. 센나게립 왕 때의 神魚 복장을 한 司祭들의 기능이 페르시아 신화의 「가라」의 기능과 서로 통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아유타국 王孫

神魚像을 연구하는 동안 나는 아요디아를 4회 방문하였다. 그런 과정에서 아요디아에 지금도 살고 있는 왕손인 미쉬라氏를 만나게 되었다. 지금의 인도는 공화국체제니까 총리가 다스리는 나라이지만 각 지역에는 前 시대부터의 토착세력인 토호土豪들이 있다. 중앙정부는 이들에게 재산권을 허용하고 있어서 미쉬라 가문은 학교·병원·莊園(장원) 등을 경영하고 있다.

현재 아요디아의 왕손이 그 옛날 아유타국의 공주인 허황옥과 혈연으로 연결될는지는 다음 문제로 하고 우선 서로 역사적 정보만이라도 교환하자는 목표를 세웠다. 그래서 총리 시절의 金鍾泌씨 초청으로 미쉬라氏 부처가 김해를 방문하였고, 이어서 김해 金氏 종친회원들과 김해 출신 실업인들이 아요디아를 방문하였다. 그 결과 아요디아에 허황옥 기념비가 세워지게 되었다.

2002년 부산에서 개최된 아시아경기 때 화려한 입장식이 있었다. 이때 인도 공주가 가락국에 시집오는 과정이 연출되었다. TV 감독이 내게 전화를 하여 입장식에 참석해 달라고 하였다. 인도 공주가 어떤 과정으로 한국에 시집오게 되었는지 해설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나는 마침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한 고고학자의 연구내용이 국제 체육행사에 채택되어 TV 방송을 통하여 아시아人 모두에게 알려지고 있는 현상을 보면서 긴 세월 동안 苦行에 가까운 추적과정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몸은 지쳐 있었지만 마음만은 뿌듯했다.

전설이 역사로 굳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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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론
“허왕후 신화는 불교 사찰의 조작” - “태정산에 왕후사 건립 기록 신빙성”

허왕후, 과연 인도에서 왔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