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적을 회유하여 내편으로 만들려 한 전략이 실패하여, 오히려 적이 아닌 사람 혹은 내편마저 적이 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 남송 초기에 도적이 창궐하자 그들을 항복시키려고 도적을 우대하는 유화책을 썼더니, 도적이 되어야만 정부의 대우를 더 잘받는다고 잘못 인식되어, 오히려 정부군이 도적으로 변한 과정에 생긴 말." _ SERI
<권중달교수의 역사칼럼>
유인작적(誘人作賊)
사람을 유인(誘引)하여 구적(寇賊)을 만들다.
2022.01.01.
국가나 사회에 골치 덩어리로 생각되는 것이 구적(寇賊)이라고 불리는 도적 떼다. 그들은 무력을 동원하여 불법적으로 노략질하거나 남의 물건을 빼앗고 심지어는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개인으로서는 이들에게 대항할 힘이 없으니 그저 하릴 없이 당하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구적이란 나쁜 사람들이고 어떻게 하든지 없애야 하는 존재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국가권력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이러한 구적이 있다면 소탕하여 발붙일 곳이 없도록 하여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은 안심하고 국가권력을 믿고 그 정치적 지휘에 기꺼이 따른다. 이것이 정상적인 국가의 모습이다.
그러나 국가권력을 쥔 관원이 구적을 토벌하라는 임무를 맡고서 휘하의 병졸을 지휘하여 이미 만들어진 구적을 막지 못하는 것은 물론 멀쩡하게 구적을 토벌하도록 동원된 휘하의 병사 혹은 멀쩡한 민간인이 구적에 합류하게 된다면 어떨까? 생각만 해도 끔찍한 구적들의 세상으로 바뀌어 갈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겨날 수 있을까? 역사를 보면 남송 초에 이러한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북송의 휘종과 흠종이 금(金)에 포로가 되어 간 다음에 남송 고종(高宗)이 응천부(應天府)에서 황제에 오른 시절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 시기에 송(宋)나라는 금(金)나라에 금(金)이나 은(銀) 같은 보물을 모두 빼앗겼으니, 새로 탄생한 남송 조정에서는 당장 국가를 운영할 재정을 충당하기 위하여 무리하게 부세(賦稅)를 거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하니 백성들은 여기저기서 아우성치다가 하는 수 없이 산속으로 도망하는 유민(流民)이 생겼고 이들 유민들이 모여서 도적떼가 되었다. 살기위한 수단이었다. 원래 이러한 유민들은 국가의 피해자이지만 일단 도적 떼가 되면 가해자로 돌변하여 이곳저곳을 다니며 노략질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어쨌거나 조정에서는 이 구적을 진압해야 정부의 권위도 세워지고 안정적으로 국가 운영도 가능해 지기 때문에 이 구적의 진압은 가장 먼저 필요한 일이 된다.
이 시기에 경제적으로 우위지역이라고 할 강남 절강(浙江)지역에서 일어난 구적(寇賊)의 세력이 컸다. 남송조정에서는 이를 진압하지 않으면 송왕조의 재건도 위협에 빠질 상황이었으니 아무리 살림이 어렵다고 하여도 구적의 진압이 우선일 수밖에 없었다.
조정에서는 드디어 주격(周格)과 고사동(高士曈)에게 관직을 주어서 이 임무를 맡겼다. 이 때 이들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그래도 1만여 명이나 있었다. 이 정도로 적지 않은 수를 가진 군대라면 아무리 커다란 구적이라고 하여도 충분히 제어할 무력은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무력을 가진 진압책임자인 고사동은 되도록 구적들과 전투를 하지 않고도 항복을 받아서 이 문제를 해결할 생각을 가졌다. 사실 이러한 유화정책은 성공한다면 좋은데, 그러려면 관군은 그 힘을 구적들에게 보여 주어서 구적들이 스스로 관군을 상대할 수 없다고 인정할 정도의 준비를 해 놓은 상황에서 교섭하여야 성공할 수 있다.
그러나 구사동의 유화책에는 아무런 준비도 없었다. 결국 피아(彼我)의 힘의 우위를 점검함도 없이 관군은 당연히 구적들보다 강한 무력을 가졌다는 생각만을 가지고 유화정책을 편 것이다. 그러나 구적들은 살아남으려는 세력이므로 교섭을 하면서도 계속하여 상대를 살피었고 기회가 있다면 속이려고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사동은 유화책을 내 놓은 것은 ‘구적은 항복하기만 하면 죄를 묻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구적 가운데 높은 사람은 그에 상응하는 관직까지 주겠다.’고 하였다.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이러한 파격적인 조건이라면 구적들이 반가워하며 구사동에게 와서 항복하고 구적의 생활을 청산할 만도 하였다. 그러면 구사동은 군사력을 동원할 필요가 없이 진압작전이 성공할 것이다. 정말로 구사동의 생각한 대로 될까?
이러한 고사동의 이 순진한 대책을 본 적여문(翟汝文)은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 그는 먼저 ‘구적들은 이미 관군의 주수(主帥)를 죽였고, 물자를 운반하는 책임을 지고 있는 조신(漕臣)을 목 베었다.’고 구적들의 죄를 지적하였다. 관군의 지휘자와 물자를 운반하는 책임자를 죽이고 도적질을 하였는데, 그 죄를 묻지 않겠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받아들일 때 받아들이더라도 상대가 스스로의 잘 못을 인정하게 하고, 그런 잘 못이 있음에도 받아들인다는 것은 큰 은덕을 베푸는 것임을 인식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살인자를 보고 자수하기만 하면 살인죄를 면제하겠다는 말 같다는 것이다. 이 말도 안 되는 대책을 그는 ‘유인작적(誘人作賊)’이라고 표현하였다. 도적을 막고 진압하라고 하였더니 도적들에게 엄청난 우대를 하는 바람에 옆에 있던 사람들까지 오히려 도적이 되게 한다는 뜻이었다.
과연 결과는 어떠하였을까? 고사동의 유화책이 성공하였을까, 아니면 적여문의 예측이 적중했을까?
아니나 다를까? 구적들은 고사동 등의 이러한 유화책을 보자 바로 이를 이용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먼저 사람을 파견하여 ‘우리가 수주(秀州)로 가서 항복할 터이니 항복을 받아 주십시오.’라고 한 것이다. 이 연락은 받은 고사동은 자기의 대책이 성공한 것으로 여기고 아무런 무장도 없이 구적들의 항복을 받으려고 수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별안간에 미리 수주에 들어가 있던 구적의 기병 1백 명이 나타났다. 항복을 받으러 갔다가 도리어 위기를 만난 것이다. 다행히 그 근처에 있던 포이손(鮑貽遜) 수하의 창을 들고 몽둥이들 든 병사들이 도와주는 바람에 겨우 죽음을 면하였을 뿐 그 대책은 완전히 실패하였다.
그 후에 고사동과 함께 진압책임을 진 주격이 군사를 끌고 왔지만 힘을 발휘할 수 없었고, 관군들도 자기들은 이처럼 전투를 기피하다가 언제 구적들에게 당할지 모르는 군대라고 생각되었다. 지휘자가 이러하니 관군들은 스스로조차 믿을 없게 되어 버렸다.
이러한 상황을 바로 알아차린 구적들은 오히려 그동안 약탈한 재물을 가지고 관군을 유혹하였다. 관군들 가운데서도 자기가 속한 관군은 믿을 수 없으니 우선 재물을 준다는 구적에 들어가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많은 관군의 병졸은 관군을 떠나서 구적들 속으로 들어갔다. 고사동의 대책은 유인작적한 것이 틀림없어 보이고 적여문의 예측이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다.
사실 이때에 이러한 일이 고사동의 경우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신도종(辛道宗)도 군사를 이끌고 구적을 토벌한다고 나갔는데, 진강부(鎭江府)를 지날 때 그 지역 책임자인 조자숭(趙子崧)이 구적을 토벌하러 온 군사들에게 수고가 많다고 말하고 위로하면서 많은 호사품(犒師品)을 주었다. 그런데 신도종은 이를 제대로 병사들에게 주지 않자, 병사들이 들고 일어났고 신도종은 도망하였다. 어쩔 수 없이 들고 일어난 병사들은 이제 갈 곳이 없게 되자 일부는 뿔뿔이 도망하였고, 남은 군사들은 현재 자기들과 함께 있기는 하지만 예전에 도적(盜賊)이었던 고승(高勝)을 추대하여 그를 중심으로 전체가 도적이 되었다. 역시 유인작적의 적절한 예이다.
사실 이 말도 안 되는 유인작적 조치가 남송초 아직 질서를 제대로 잡을 수 없었던 시절에만 있었던 일일까? 혹 오늘날에도 정책을 만들고 조치하는 가운데서 원래의 의도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드러내서 유인작적하는 일은 없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지난 1년은 코로나19의 방역으로 온 나라, 온 세계가 온통 난리였고, 지금까지도 이 긴장은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 정부는 강력하게 집회를 금지시키는 정책을 폈다. 교회의 모임도 제한하였고, 자영업자들이 자동차 안에서 시위를 하겠다는 것도 제한하였더니 모두 잘 순응하였다. 그만큼 이러한 방역대책은 불편하지만 참아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을 얻은 때문이다. 그런데 오직 민노총의 집회만은 정부의 조치에 아랑곳없이 강행되었고 정부도 손을 놓다시피 하였다.
이제 우리 사회에서 민노총에 가입하면 큰 힘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업장의 사용주는 일부 민노총의 실력행사로 사업을 접고 죽음의 길을 택한 사람이 생겨나서 뉴스의 사회면을 장식하였다. 이제 자영업자 가운데는 사업을 접고 민노총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이 생겨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비유가 지나치다고 할 수 있지만 남송초 구적(寇賊) 속에 들어가야 먹고 살 길이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어 구적의 수가 늘어갔던 상황이 머리에 떠오른다. 원래 노조(勞組)는 약자들이 살길을 찾아서 서로 단결하였던 모임이었지만, 지금에는 그 힘이 커져서 기업체의 인사권에 개입하고, 직장을 대물림하면서 실제적인 지배자가 되었다. 이제 그들은 약자가 아니라 강자이며 때로는 법질서를 아예 무시할 정도의 세력이 되었다.
당국자의 대(對) 노조(勞組) 정책을 보면서 엉뚱하게도 남송초에 구적(寇賊)을 대하였던 남송조정의 대책이 오버랩 되어 읽히는 것은 나의 지나친 비약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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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브라 효과, 모택동의 참새 사냥, 펠츠만 효과, 고양이 낙하산 부대..
https://athenae.tistory.com/16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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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택동의 제사해운동(除四害運動)
"참새가 곡물을 먹는다는 것을 곡물만 먹는다고 성급하게 맹신한 것도 문제였다. 1958년 한해간 참새가 2억 1천만 마리가 잡히며 사실상 중국 내륙에서 참새의 씨가 마른 1959년, 농사가 흥할 거라는 정부와 농민들의 기대와 달리 황충을 위시한 참새에게 피식당하던 해충들의 개체수가 조절되지 못해 해충이 막대한 규모로 발생했다. 거기에 후술할 여러 요인까지 겹쳐 중국사에 길이 남을 대흉년이 벌어졌고 공식 발표 2,000만 명, 학계 추산 최소 3,000만 이상, 최대 4,500~6,000만 명의 기록적인 아사자가 발생했다.
황충 군집은 말 그대로 참새를 '따위'로 취급할 정도로 농촌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고, 일본뇌염, 뎅기열, 황열, 웨스트나일열, 말라리아, 이질, 장티푸스, 살모넬라, 콜레라 등의 각종 질병들을 옮기는 질병의 매개체 역할을 하던 모기와 파리도 포식자인 참새가 없어지면서 폭발적으로 번식, 전염병을 대규모로 퍼뜨렸다.
결국 식량 생산량은 낮아지고 질병 발병률은 높아져버린 인류사 전체로 봐도 드물 정도의 악재가 겹쳐졌다."
https://namu.wiki/w/%EC%A0%9C%EC%82%AC%ED%95%B4%20%EC%9A%B4%EB%8F%99
제사해 운동 - 나무위키
말 그대로 폭망했다. 우선 사해랍시고 올려놓은 생물들의 포획 난이도부터가 차원이 달랐다. 크기도 큰 데다가 눈에도 잘 띄고 번식도 한정적이고 지상에서 사는 참새와 달리 쥐는 하수도에 살
namu.wi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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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VIfl0Su1O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