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쿠르고스(Lycurgus) _ 스파르타의 전설적 입법자
리쿠르고스(Lycurgus) _ 스파르타의 전설적 입법자
** 리쿠르고스는 스파르타의 전설적인 입법자로서, 스파르타를 강력한 군국주의 국가로 그 기초를 확고히 다졌다.
그는 스파르타식 교육, 집단 생활, 집단 결혼 등을 도입하였고, 특히 금 대신 철로 화폐를 만들어 부의 축적을 어렵게 하였다.
너무 엄격한 법제도의 추진으로 특히 귀족들의 많은 반발을 사고, 암살의 위기를 겪기도 하였다.
자신의 뜻에 대한 반발이 끊이지 않자, 법의 미비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신탁을 받아오겠다고 하고 델피로 떠난다. 떠나면서 이렇게 당부한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스파르타의 법을 절대로 바꾸지 말라"
그런데 그는 돌아오지 않는다. 델피에서 자살을 한 것이다.
** 역사적 존재와 신화적 인물 사이
리쿠르고스는 기원전 9세기에서 8세기 사이에 활동한 것으로 추정되는 스파르타의 전설적인 입법자입니다1. 그리스어로 Λυκοῦργος(뤼쿠르고스)라고 쓰며, 델포이의 아폴론 신탁에 따라 스파르타 사회를 군국주의로 개혁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1. 헤로도토스, 크세노폰, 플라톤, 플루타르코스 등 고대의 저명한 역사가들이 그의 존재를 언급했으나, 현대 학계에서는 그의 역사적 실존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이 우세합니다2.
리쿠르고스는 헤라클레스의 11대 후손으로 전해지며, 스파르타의 전통적인 2대 왕가 중 하나인 에우리폰 왕조의 에우노모스 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고 합니다3. 아버지 에우노모스는 정치적 혼란 속에서 민중의 폭동을 막으려다가 백정의 칼에 찔려 죽었고, 첫째 아들인 폴리덱테스가 왕위를 계승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습니다3. 리쿠르고스가 왕위를 계승할 차례였지만, 형수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자 아이가 남아일 경우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선언하며 단지 8개월간만 섭정을 맡았습니다4.
** 개혁을 위한 여행과 견문
리쿠르고스의 개혁은 광범위한 여행 경험에서 나온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는 크레타에서 탈레스라는 현명한 정치가와 교류하며 그 지역의 엄격하고 공정한 법률을 접했습니다35. 크레타에서 소아시아로 이동한 그는 호메로스의 시를 처음 접하게 되었고, 이를 정리하여 스파르타에 소개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3. 이집트 여행에서는 군인과 일반 백성을 분리하여 다스리는 계급 체계를 관찰했으며, 이는 후에 스파르타의 사회 체계 구성에 영향을 미쳤습니다36.
리쿠르고스가 스파르타를 떠나 있는 동안 국내 정치 상황이 악화되어 스파르타인들은 그의 귀국을 간절히 원했습니다3. 왕들조차 그의 도움을 필요로 했으며, 결국 델포이의 아폴론으로부터 자신의 개혁에 대한 긍정적인 신탁을 받고 돌아와 전면적인 개혁에 착수했습니다3.
** 리쿠르고스의 포괄적 사회 개혁
- 정치 제도의 혁신
리쿠르고스 개혁의 핵심은 28명으로 구성된 원로원(게루시아) 창설이었습니다1. 원로원은 왕과 동등한 입법 권력을 가지며 왕의 과열된 통치를 완화하는 역할을 했습니다7. 플루타르코스는 이를 "종전에는 정체가 공중에 붕 떠 있어 어떤 때는 왕을 쫓아 참주정치로 기우는가 하면, 어떤 때는 대중을 쫓아 민주정치로 기울기도 했으나, 지금은 원로원이 바닥짐 역할을 하여 국가라는 배를 평평한 용골 위에 올려놓음으로써 국가는 가장 안정적이고 질서 있게 정돈되었다"고 평가했습니다7.
- 경제 개혁과 평등주의
리쿠르고스는 토지를 공정하게 재분배하여 모든 스파르타인을 자립 가능한 자영농으로 만들었습니다1. 귀금속 화폐를 폐지하고 식초에 담가둔 녹슨 쇠 화폐를 도입했는데, 이는 단위 무게당 가치가 낮아 숨기거나 옮기기 어려워 관리의 비리와 재산 은닉을 방지하는 효과가 있었습니다1. 주택의 크기와 형태, 가구와 의복의 수준을 제한하여 모든 스파르타인이 동일한 생활 수준을 유지하도록 했습니다1.
- 공동체 제도와 교육 시스템
공동 식당(시시티아) 제도를 구역별로 설치하여 시민들이 함께 식사하며 친분을 쌓고 형제애를 형성하도록 했습니다1. 시민들에게 자녀 부양 및 교육 의무를 부여하고, 7세부터 20세까지의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아고게(agoge) 교육 시스템을 구축했습니다18. 아고게는 생활 유지에 필요한 사냥, 합리적 사고를 위한 논변학과 수학, 전투를 위한 실전 체육을 포함했습니다1.
그러나 이 교육 과정에서 장애가 있는 아이들은 사회 효율성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버려지거나 죽임을 당했으며, 과도한 경쟁으로 인해 많은 아이들이 사망했다고 전해집니다1.
- 군사 제도와 사회 통제
모든 스파르타 시민에게 군사 훈련을 의무화하고, 크립테이아(Krypteia)라는 제도를 통해 젊은 스파르타인들이 헤일로타이(노예)를 살해하는 행위를 군사 교련의 일환으로 장려했습니다9. 매년 에포로스(민선 장관)가 헤일로타이에게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이러한 살육을 정당화했습니다9.
민선관 제도를 두어 왕, 장로, 시민을 감시하게 하였으며, 이기적이고 향락적인 생활 양식을 억제했습니다1. 재산 권리에서 남성과 여성 간의 차별을 두지 않았으며, 양성에게 비슷한 권리와 의무를 부여했습니다1.
- 스파르타 사회의 계층 구조
리쿠르고스의 개혁으로 완성된 스파르타 사회는 세 개의 명확한 계층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최상층인 스파르티아타이(호모이오이)는 완전한 시민권을 가진 전사 계층으로, 약 5만 명 정도였습니다10. 중간층인 페리오이코이는 "변두리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재산 소유권과 어느 정도의 자치권은 있었으나 참정권은 없는 반자유민이었습니다1112. 이들은 주로 상공업과 무역에 종사했으며, 군사 의무도 있어서 플라타이아 전투에서는 약 5,000명이 중장보병으로 참전했습니다11.
최하층인 헤일로타이는 국유 노예로 약 10만 명이 존재했으며, 주로 농업에 종사하면서 수확물의 일부를 스파르타에 공납했습니다9. 이들은 가족을 가질 수는 있었지만 대대로 노예 신분을 물려받았으며, 스파르타인들은 항상 이들의 반란을 두려워했습니다9.
리쿠르고스 체제 하에서 스파르타인들은 매년 헬로타이(노예)에게 선전포고를 하여 젊은 스파르타인들이 헬로타이를 살해하는 행위를 군사 교련의 일환으로 정당화했습니다4. 이는 **크립테이아(Krypteia)**라는 제도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4.
특히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헬로타이들이 메세니아 사람들과 공모해서 폭동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더욱 가혹한 탄압이 가해졌다고 전해집니다1. 스파르타에서는 헬로타이들에 대한 학대와 살해가 공공연하게 자행되었습니다1.
** 역사적 평가와 논쟁
- 긍정적 평가
리쿠르고스의 개혁은 스파르타를 그리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국가로 만들었습니다4. 그의 법은 철저하게 집행되었으며, 왕부터 일반 시민까지 모든 사람이 법에 의해 행동의 제한을 받았습니다4. 스파르타인들은 이 법이 자신들의 이익을 지켜주고 스파르타를 공정하고 강하게 만든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4.
크세노폰은 리쿠르고스가 확립한 법과 제도를 스파르타 성공의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분석했습니다13. 스파르타인들은 어려서부터 극기와 절제를 몸에 익히도록 교육받았고, 끊임없는 신체 단련을 통해 최고의 전사로 성장했습니다13.
- 부정적 평가와 현대적 비판
현대에는 리쿠르고스가 만든 스파르타 체제를 전체주의의 원형으로 보는 시각이 강합니다14. 한 토론에서 참가자들은 "리쿠르고스가 만든 스파르타의 모습은 현대식으로 말하면 북한에 가깝다"며 "전체주의적인 사회가 너무 갑갑하게 느껴진다"고 평가했습니다14. 개인의 자유가 철저히 배제되고 국가가 개인의 모든 것을 통제하는 시스템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15.
특히 헤일로타이에 대한 체계적인 억압과 학살, 장애 아동에 대한 살해, 과도한 군사주의 등은 현대 인권 기준으로 볼 때 심각한 문제로 지적됩니다91.
** 역사적 실존성에 대한 의문
현대 학계에서는 리쿠르고스의 역사적 실존에 대해 회의적입니다2. 그의 개혁이 한 개인의 업적이라기보다는 오랜 시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스파르타 사회의 변화를 상징적 인물에게 귀속시킨 것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강합니다2. 플루타르코스조차 "입법자 리쿠르고스에 관해서라면 무엇을 이야기하든 논쟁을 피할 길이 없다"고 언급했을 정도입니다16.
** 후대에 미친 영향
- 고전 시대의 영향
리쿠르고스와 스파르타 체제는 플라톤의 『국가』에서 이상국가의 모델로 일부 참조되었으며, 후대 정치사상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17.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는 장 자크 루소가 스파르타를 가장 이상적인 국가로 평가하기도 했습니다18. 루소는 스파르타의 평등주의와 공동체 정신을 높이 사며 현대 민주주의 발전에 영감을 제공했습니다18.
- 현대적 의미와 교훈
리쿠르고스의 사상은 20세기 전체주의 사상의 양극단에서 모두 환영받았다는 점에서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할 측면이 있습니다19. 평등주의와 공동체 정신이라는 긍정적 가치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전체주의적 통제라는 부정적 측면이 공존한다는 점에서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합니다19.
리쿠르고스는 자신이 제정한 법이 변함없이 유지되도록 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던졌다고 전해집니다14. 이는 법의 수호를 위한 극단적 헌신으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과도한 국가주의의 위험성을 보여주는 사례로도 평가됩니다20.
** 결론
리쿠르고스는 역사와 신화의 경계에 있는 인물로, 그의 실존 여부와 관계없이 스파르타라는 독특한 사회 체제의 상징으로 기능해왔습니다. 그가 대표하는 개혁 정신은 평등주의, 공동체 의식, 법치주의라는 긍정적 가치와 전체주의, 개인 자유의 억압, 폭력적 통제라는 부정적 측면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리쿠르고스와 스파르타 체제를 이해하는 것은 단순히 고대사에 대한 지식을 넓히는 것을 넘어서, 국가와 개인의 관계, 평등과 자유의 균형, 법과 질서의 의미에 대해 깊이 성찰할 기회를 제공합니다. 그의 유산은 오늘날에도 정치철학과 사회제도 설계에 있어 중요한 참고점이 되고 있습니다.
***
<리쿠르고스의 마지막 여행과 법 변경 금지 서약 기록>
리쿠르고스가 여행을 떠나면서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법을 변경하지 말라고 한 기록은
'플루타르코스(Plutarch)'의 『영웅전』 중 「리쿠르고스 전」 29장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플루타르코스는 리쿠르고스의 마지막 여행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12:
리쿠르고스는 자신의 개혁이 안정적으로 정착된 것을 확인한 후, 국가의 가장 중요한 사안에 대해 델포이 신전에서 아폴론의 신탁을 받아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는 모든 시민들을 소집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마련한 제도들은 국가의 번영과 덕을 증진시키기에 충분하지만, 가장 중대하고 중요한 일이 남아있어 델포이에서 신의 뜻을 물어보기 전에는 여러분에게 공개할 수 없다. 따라서 내가 델포이에서 직접 돌아올 때까지는 기존의 법을 준수하고 어떤 변경이나 수정도 하지 말아야 한다. 그 후에 신이 가장 좋다고 여기는 바를 따르겠다."
그러고서 리쿠르고스는 시민들의 동의를 얻은 후, 다음과 같은 순서로 서약을 받았습니다12:
- 먼저 두 왕들로부터 리쿠르고스가 돌아올 때까지 기존 정체(政體)를 유지하겠다는 맹세를 받았습니다
- 그 다음 원로원(게루시아) 의원들로부터 같은 서약을 받았습니다
- 마지막으로 일반 시민들로부터 동일한 맹세를 받았습니다
델포이에서의 신탁과 죽음
델포이에 도착한 리쿠르고스는 아폴론 신에게 자신이 제정한 법률이 국가의 행복과 덕에 적합한지 물었습니다. 신탁은 그의 법률이 훌륭하며, 이 법을 지키는 한 스파르타는 최고의 명예를 누릴 것이라고 답했습니다31.
리쿠르고스는 이 신탁을 기록하여 스파르타에 보낸 후, 시민들을 서약에서 해방시키지 않기 위해 스스로 음식을 끊고 죽음을 선택했습니다32. 플루타르코스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그는 시민들의 맹세를 해제해주지 않기로 결심하고, 자발적으로 생을 마감하기로 했다. 그는 살려고 하면 더 살 수 있고, 죽으려고 하면 죽어도 좋을 나이에 이르렀으며, 주변 사람들이 충분히 행복하게 살고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역사적 의미와 결과
이러한 리쿠르고스의 행동으로 인해 스파르타인들은 그가 돌아올 때까지 법을 변경하지 않겠다는 서약에 영원히 구속되게 되었습니다42. 플루타르코스는 이로써 "그의 일생의 사업이 영원히 지속될 수 있게 되었다"고 평가했습니다.
실제로 스파르타는 리쿠르고스의 법률을 약 500년 동안 그대로 유지했으며, 아르키다모스의 아들 아기스 왕에 이르기까지 14대에 걸쳐 어떤 왕도 리쿠르고스의 법률을 근본적으로 변경하지 않았습니다2.
기타 고대 사료의 언급
크세노폰(Xenophon)도 『라케다이몬인들의 정체』에서 리쿠르고스가 델포이를 방문하여 자신의 법에 대한 신탁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어, 이 이야기의 신빙성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5.
이처럼 리쿠르고스가 여행을 떠나면서 시민들에게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법을 변경하지 말라고 한 서약의 기록은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에 가장 상세하게 보존되어 있으며, 이는 고대 그리스 정치사상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
<리쿠르고스에 관한 에피소드들>
1.형수의 유혹
리쿠르고스가 섭정을 하고 있을 때, 형수가 은밀하게 접근하여 뱃속의 아이를 사산시키고 자신과 결혼하여 왕과 왕비의 자리에 오르자고 유혹했습니다1. 그러나 리쿠르고스는 이러한 부도덕한 제안을 거절하면서도 지혜롭게 대응했습니다1.
그는 **형수에 대한 역겨운 속마음을 숨기고, "사산시키면 형수의 건강을 해칠 수 있으니 아이를 출산하면 자신이 아이를 죽이겠다"**고 형수를 속였습니다1. 실제로는 아이를 보호하려는 의도였습니다1.
아기가 태어나자 리쿠르고스는 **아기를 안고 "스파르타인이여, 그대들의 왕이 태어나셨소!"**라고 선언하며 아기를 왕좌에 눕히고, **"온 백성의 기쁨"이라는 뜻의 '카릴라우스'**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1.
2. 암살자 알칸더를 포용하다
리쿠르고스의 개혁에 반대했던 부자들이 그를 공격했을 때, 알칸더(Alcander)라는 젊은이가 막대기로 그를 공격하여 한쪽 눈을 실명시켰습니다23.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이 사건은 리쿠르고스가 시민들에게 둘러싸여 돌팔매질을 당하다가 일어났습니다2.
놀랍게도 리쿠르고스는 자신의 눈을 멀게 한 알칸더를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 시중을 들게 했습니다1. 알칸더는 리쿠르고스와 함께 생활하면서 그의 온화함, 차분한 정신, 엄격하고 소박한 생활 습관을 직접 목격하게 되었습니다2.
이를 통해 알칸더는 리쿠르고스에게 존경심과 경외감을 갖게 되었으며, 겸손하고 자제력 있는 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1. 이 에피소드는 리쿠르고스의 모범적인 실천 철학과 용서의 정신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1.
3. 호메로스의 시를 세상에 알리다
리쿠르고스는 여행 중 소아시아에서 호메로스의 시를 처음 접했다고 전해집니다1. 호메로스의 시에 매료된 그는 고국으로 돌아가서 그의 시를 정리하고 체계화했습니다1.
흥미롭게도 우리에게 잘 알려진 호메로스의 시를 세상에 처음 알려 유명하게 만든 사람이 바로 리쿠르고스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1. 이는 그가 단순한 정치개혁가가 아니라 문화적 소양도 깊었음을 보여줍니다.
4. 크레타의 탈레스와의 만남
리쿠르고스는 크레타에서 현명한 정치가 탈레스를 만나 깊은 교류를 나누었습니다1. 탈레스는 리쿠르고스의 요청에 의해 스파르타에 갔을 때 '떠돌이 서정 시인'으로 위장했다고 합니다1.
탈레스의 아름답고 온화한 언어는 사람들의 정서에 깊은 영향을 끼쳤으며, 이는 리쿠르고스가 교육 제도의 기초를 다지는 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