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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習_아테나이칼럼

오키나와 가족 여행(2019년 1월)

by 변리사 허성원 2022. 10. 13.
(** 2019년 1월 26일부터 2박 3일간 우리 식구들이 오끼나와를 여행했습니다. 그때 밴드에 올려두었던 것을 여기로 옮겨싣습니다.)
 
 
 
[오키나와]#1

지금 저는 벚꽃 축제에 와있습니다.

도대체 어디에 갔길래 이 동지섣달에 벚꽃타령을 하고 있냐구요?
오키나와입니다. 식구들과 가벼운 여행을 왔습니다.
1월에 벚꽃축제라니..
남쪽이라 꽃이 일찍 핍니다.

실제로 점심 식사하러 간 식당의 마당에 벚꽃이 버젓이 피어있네요.
오늘 점심을 해결한 식당은 나하시의 슈리성 가까이에 있는 맛집입니다.
가게 이름은 아시비우나아.
제가 가장 싫어하는 게 식당 줄서기인데.. 식구들의 고집에 30분 이상을 기다렸다가 겨우 자리에 앉을 수 있었습니다.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는 순간, 참고 기다리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당을 향해 일렬로 죽 앉는 구조인데.. 일본 전통의 정원을 바라보며 식사하는 경험은 쉽지 않죠.

아내는 가지와 두부를 주재료로 한 것을, 아들은 오징어먹물 소바를, 나는 족발찜을 시켰습니다. 가격은 대충 1천엔 전후.
정말 맛있었습니다. 식구들 모두 거침없이 엄지 척이었습니다.

일본을 종종 다니긴 하지만 이번만큼 괜찮은 식사는 만나기 어렵습니다.

오키나와는 원래 류큐왕국이라는 독립국가였습니다.
1800년대 말 우리와 바슷한 시기에 일본에 병탄되었지요. 1945년 이후에는 미국이 점령하였다가 1972년에 일본에 되돌려주었다고 합니다.
아직도 오키나와의 주요 지역은 미군 군사시설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슈리성은 옛 오키나와 왕조의 궁전이었던 곳입니다.
슈리성에서 내려다본 정경입니다.
우리나라가 해방을 통해 독립을 하지 못했다면, 류큐왕국과 같은 처지에 있겠지요.
우리나라의 분단도 마찬가지이지요. 우리 분단과 류큐의 소멸은 모두 약한 나라의 서러운 운명이었습니다.
 
 
[오키나와]#2

일본에서 버스를 타보셨나요?

이 번 여행은 차를 빌리지도 않고 가족들과 자유여행으로 다녔기에, 좀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일단 엄청 많이 걸었습니다. 무릎이 시원찮은 데도 무리를 했었지요.
그리고 버스와 모노레일 등 대중 교통을 주로 이용했습니다.

공항리무진은 상식에 그리 어긋나지 않습니다만, 시내버스는 상당한 문화적 충격을 주었습니다.
일본 시내버스에 비하면 우리나라 시내버스는 최첨단 시스템으로 우리는 너무도 편리하게 이용하고 있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네요.

일본 시내버스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탑승거리에 따라 차비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물론 거리-차비 연동 시스템은 매우 합리적인 정책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많은 거리를 탄 사람이 많은 비용을 지불하는 것은 당연하지요.
그런데 이 시스템의 가장 힘든 문제는 각 이용자가 어디서 탔고 어디서 내리는가를 정확히 알아야 되고, 그에 따라 요금이 매겨져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신용카드 결재가 보편화 되어 있고, 중국은 모바일 결재가 지배적이지만, 일본은 거의 모든 지불이 아직 현금 결재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일본은 그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도 자동결재와 같은 IT기술은 사회시스템에 매우 소극적으로 이용되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동전의 유통이 엄청 많고, 거기다 부가세 때문에 1엔짜리가 많이 사용됩니다.
일본에서 잠시 돌아다니고 나면 금세 주머니에 동전이 가득입니다. 동전을 적시에 처분할 것을 신경쓰지 않으면 어느새 걷잡을 수 없이 주머니에 동전 쇠붙이가 늘어납니다.

시내버스에서 버스비를 어떻게 처리하는지를 보면, 일본의 현금결제 문화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버스를 타면 차문과 운전수 사이에 기계가 두어대 놓여있습니다.
처음 차에 오르면, 눈앞의 기계에서 승차표를 뽑아야 합니다.
승차표에는 탑승 정류장에 대응하는 번호가 찍혀 있습니다.
버스가 여러 정류장을 거치면서 사람이 늘어나게 되면, 탑승 정류장 별로 차비가 계산되어 모니터에 뜹니다. 아래 그림과 같습니다.
그림을 보면, 160엔에서부타 730엔까지 다양하지요.

내릴 때에는 운전수 옆으로 가서, 결재 기계에 승차표를 넣어 차비를 확인한 다음, 동전으로 차비를 투입합니다. 그런 다음 내립니다.
현지 사람들은 익숙해서인지 걱정한만큼 지체되지는 않더군요.
하지만, 한 손에는 짐이나 휴대폰 등을 들고, 다른 손에는 승차표와 동전을 챙겨들고 버스기사에게로 가서 차비 금액을 확인하고 돈을 결재하는 과정을 보니, 너무도 답답해보였습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우리의 '빨리빨리' 문화가 고맙습니다.

적어도 버스 문화에서는
우리나라가 무조건 일본보다 어엄~~~청 선진국입니다
 
 

 

[오키나와]#3

돌아오는 날 비행기 탑승까지 몇 시간이 빈다.
그래서 검색해보니, 오키나와 현청 가까이에 중국정원이 있다길래 짐을 공항 락카에 넣어두고 모노레일로 이동하였다.

중국식 공원은 그다지 감동을 줄만한 게 없었다.
공원관람 후 바닷가로 이동하여 해변을 잠시 거닐다가, 국제거리를 향해 이동하였다.

이동 중에 시선을 끄는 묘한 건물이 있어 살펴보았다.
'쓰시마호기념관'(対馬丸記念館)이다.

바깥에 세워진 설명문을 읽어보니,
미국과 일본간의 태평양 전쟁이 한창일 때
일본은 미국과의 전쟁을 대비하여 오키나와에 있던 주민들을 소개시키기로 하여,
초등학생 3학년 내지 6학년 학생 826명과 일반 소개자 835명을
쓰시마호((쓰시마마루 対馬丸)에 싣고 일본 본토를 향해 떠났다.
이 배는 3일간 항해를 하다가 가고시마 인근에서 미군 잠수함의 공격을 받아 침몰한다.
이 때 함께 이동하던 일본군 수송선과 전함들은 희생자들을 방치한 채 모두 도주하였다.
이 사건은 일본 정부의 철저한 보도통제와 억압으로 비밀로 유지되다가, 살아남은 소수 생존자의 증언으로 진실이 밝혀져 기념관이 2004년에 세워지게 되었다고 한다.

쓰시마호 사건을 보니 우끼시마호 사건이 떠올랐다.

일본은 패전한 후 강제징용으로 끌려간 조선인들을 귀국시킨다.
그 배가 우끼시마호(浮島丸)이다.
이 배에는 많게는 1만5천명이 탑승하였다고도 하지만,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약 8500명 정도가 탔다고 한다.
1945년 8월 22일 오미나토항을 출발한 우끼시마호는 부산항을 향하는 듯하다가, 일본 서해안을 따라 이동하여 시모사바가 해군기지 앞바다에서 폭발하여 침몰시킨다.

적어도 7천명 이상의 한많은 조선인이 수장된 것이다. 일본은 조선인 524명과 일본인 25명이 사망했다고 축소 발표하였다.
일본이 배를 침몰시킨 이유는 군사기밀의 유출을 막고, 강제징용의 범죄와 참혹성을 가리기 위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들 조선인 희생자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진상이 규명된 것은 없고 보상도 이루어진 바가 없다고 한다.
 
 
 

 

돌아오지 못한 귀국선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
우끼시마호는 45년8월에 침몰하여 54년2월까지 방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 이상 2019년 1월26~28일 2박 3일간의 오끼나와 여행기를 마무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