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극우화 디스토피아를 향해 달려가는가
세계는 극우화 디스토피아를 향해 달려가는가
<The Economist>가 지난 100년간 유럽의 정치성향을 분석하였다(250228).
이 도표를 보면..
1. '강경 우파(Hard Right)'가 급격히 부상하고 있다.
보수주의 및 사회민주주의와 동등한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추세로 봤을 때는 곧 가장 강력한 유럽 정치세력이 될 것임에 틀림이 없다.
자유민주 세력이나 녹색당 등이 정체한 상태에서, 극우의 부상이 보수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하락 추세와 연동하고 있다.
이는 보수진영과 사회민주 진영의 상당 수가 극우화로 전환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2. '극우(Far Right)'라는 표현이 '강경 우파(Hard Right)'로 바뀌었다.
이제 극우가 주류 정치세력이 된 것을 인정하는 동시에, 이제 더 이상 'Far'하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인 듯하다.
3. 극우가 본격적으로 준동하기 시작한 것은 2010년도부터인 것으로 보인다.
세계 경제위기가 중요한 트리거가 된 셈이다.
그리고 2015년부터 시작된 유럽의 난민 위기가 극우 가속화의 원인이 된 듯하다.
이런 사회학적인 원인 분석은 전문가들의 영역이겠지만, 외부적인 요인으로 인한 격변의 스트레스가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되었지 않았을까 나름 추정해본다.
4. 주목해야 할 것은..
1923년 ~ 1945년 즉 2차대전 중에도 세계는 극우 세력를 크게 지지하였다는 점이다.
그런데 지금은 2차대전 당시보다 극우 세력의 비율이 더 높다.
3차 대전 혹은 이에 준하는 세계적 혼란이나 위기의 전조이지는 않을까?
5. 이런 시점에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하였고, 그의 행보는 연일 전세계에 충격을 안기고 있다.
그 충격은 바로 그가 벌이고 있는 '기존의 정의와 질서의 부정과 파괴' 때문이다.
지극히 극우화적인 증상이며 행보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상징적인 모습이 바로 엊그제께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대통령과의 회담 장면이다.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양국 정상회담의 모습을 전세계가 실시간 시청하였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것이 얼마나 잘못되고 부끄러운 일인지 전혀 모른다.
6. <이코노미스트>의 기사는 유럽 국가들의 정치 성향을 분석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충분히 세계적인 상황을 대변한다.
아니 세계는 이미 더 극우화되었을지 모른다.
7. '도대체 어찌 저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이렇게 말하게 될 믿지 못할 일들이 이제는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이미 우리나라에서도 경험하고 있지 않는가.
이렇게 하여 인류는 건전한 상식, 보편적 정의, 이타적 인간성을 급격히 잃어버린 디스토피아를 향해 달려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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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화란 무엇인가>
어디에나 극단적인 정치적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소위 극우 혹은 극좌라 불리는 세력이다.
모든 사회의 정치적인 스펙트럼은 이 양 극단 사이에 분포되어 있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양 극단이 아닌 가운데에 몰려 있기에 시이소오처럼 나름 이 사회는 균형을 유지한다.
그러다 사회 구성원들의 다수가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게 되면, 사회는 급격히 회복 탄력성을 잃고 정치적 균형이 무너져, 국가든 세계든 큰 혼란과 위기를 맞게 되는 것이다.
그런 극단화의 가장 치명적인 역사적 사례가 바로 2차대전이다.
이 세계 전쟁은 우리 인류가 겪은 가장 끔찍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독일의 나찌즘, 이탈리아의 파시즘 및 일본의 군국주의로 표현되는 극우들의 준동이 전 세계를 죽음의 지옥으로 이끌었다.
그런데 지금 그런 조짐이 보인다.
극우와 극좌의 가치는 기존 질서의 부정과 파괴에서 출발한다.
그들이 극단에 서는 이유는 기존의 보편적 질서에 큰 불만이 있고 그로 인해 그들의 운신이 제약을 받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가장 먼저 국민이 선택한 다수결의 통치를 부정한다.
그리고 헌정 법치와 권력의 분립 등 자유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도 부정한다.
그들이 부정하는 가치를 척결하기 위해서는 폭력이 필요하다.
그들은 폭력을 정당화하고 은근히 조장한다. 그리고 폭력을 조직화하여 행동화하도록 부추긴다.
작금의 우리나라의 상황을 보면, 극우의 준동이 얼마나 위험 수준에 와 있는지 가늠할 수 있다.
극우나 극좌는 항상 사회 속에 존재하여 왔다.
그들의 존재 역시 사회의 다양성과 건강함을 보여주는 척도가 된다.
극우나 극좌가 헌정 질서나 민주적 다수결의 통치를 부정하지만,
진정한 보수와 건강한 진보의 핵심 가치는 헌정 질서와 민주적 통치를 수호하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에 바탕을 둔다.
극우나 극좌가 그저 소수의 양심적 자유 범위 내에서 마음껏 생각하고 있다면 문제가 없다.
하지만 이들이 다수화되고 정치적 이익을 추구하기 시작하면 혼란의 원인이 된다.
그들이 조직화되어 제도권에서 노골적으로 자신들의 생각을 주장하고 행동으로 표현할 때,
혹은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 그런 극단적인 사람들을 끌어들여 이용할 때,
정말 심각한 문제가 된다.
2차 대전의 주범인 히틀러와 뭇솔리니도 초기에는 무시할 정도로 미미하고도 허접한 세력에 불과하였다.
그러다 노동자 등 진보적인 세력들을 견제하기 위해 기존 정치세력들이 그들과 손을 잡고 제도권에 끌어들이자,
그들은 순식간에 민주주의를 철저히 붕괴하고, 견제받지 않는 절대권력을 휘두르면서 세상을 유린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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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노, 파시즘, 그리고 교회> _ 김선주 목사
"파시즘의 원리도 이와 같습니다.
포르노 배우가 강력한 성적 무기로 상대방을 공격하여 쾌감을 얻는 것 같이 파시즘은 강력한 국가 권력으로 국민을 통제하는 전체주의로 계급적 이익을 얻습니다.
이들은 타자의 존재나 공존을 인정하지 않고 약자에게 힘을 행사하여 강자가 됩니다.
그래서 파시스트들은 우생학적 관점으로 인간과 세계를 우열관계로 보고 계급 질서를 정당하게 생각합니다.
파시스트들의 세계관을 부정하거나 그들의 계급 질서에 저항하는 세력은 폭력으로 제압합니다.
파시즘의 힘은 폭력에서 나옵니다.
힘을 과시하여 공포를 낳고, 공포 때문에 힘에 굴복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포르노와 같은 쾌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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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에 기생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_ 김정희원 _ 한겨레 250227
많은 학자들은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파시즘을 태동시킨다”고 주장해왔다.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혁명을 불러온다”는 주장의 반대쪽 극단이라고나 할까. 자본주의는 주기적으로 위기에 부딪힐 수밖에 없는데, 그 위기의 시간이 과연 어느 쪽 극단으로 폭주하느냐에 관한 이야기다. 역사를 되짚어보면 전자의 주장이 언제나 이기려는 모양이고, 이 암울한 예언은 안타깝게도 오랫동안 효력을 발휘할 것 같다. 자본주의의 위기 순간마다, 파시즘은 새로운 얼굴을 하고 우리에게 돌아온다. 마치 우리의 고통과 좌절을 완전히 타개해줄 것 같은 강력한 미신을 몰고, 그러나 결국은 이 위기를 이용해 먹는 자들의 배를 불려주기 위해서.
동시대 파시즘의 토대는 두말할 것도 없이 신자유주의다. 그런 면에서 한국 사회에 파시즘의 토양은 충분히 무르익은 상태였다. 역대 정부의 공공 지출은 형편없었으며, 그만큼 국민들은 시장 경쟁에 내몰린 채로 각자도생해왔다. 물론 윤석열 정부는 계엄 이전에도 빠른 속도로 민중들의 삶을 망치고 있었다. 모든 것을 ‘자유 시장’에 맡겨야 최선의 결과가 돌아온다고 선전하면서 우리의 안전도 뒷전, 생계도 뒷전이었으니까. 청년층과 노년층의 삶은 더욱 힘겹다. 일도 없고 구직활동도 하지 않는 청년층은 42만명을 넘어서면서 팬데믹 이후 역대 최다를 기록했고, 취업하더라도 양질의 일자리가 아니어서 많은 경우 ‘불완전 취업자’로 분류된다. 노인 빈곤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압도적 1위다.
신자유주의 정책의 결과는 민중의 삶이 한없이 불안정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파시즘의 토양이다. 정직한 노동을 끝없이 갈아 넣어도 한평생 갑질에 시달릴 것이 뻔한 세상. 경제적·사회적으로 나에게 주어져야 할 자리가 분명히 있는데, 그 자리가 나에게 돌아오지 않으니 빼앗긴 것들에 대한 박탈감은 커져만 간다. 세상이 불공정하고 뭔가 한참 잘못되었다는 울분, ‘지위 불안’, 그리고 증오로 가득 찬 이들은 자신을 구하기 위해 세상을 구하려 한다. 이 과정에서 희생양을 상대로 한 폭력은 반드시 필요할 뿐 아니라 정당하다. 그들은 세상을 망치는 적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철학자 알베르토 토스카노는 ‘경제적 가치의 위기가 오는 시간’과 ‘정체성의 위기가 오는 시간’이 수렴되는 현상으로 파시즘을 설명하기도 한다.
윤석열은 사심, 사감, 또는 사리사욕을 위해 계엄을 선포했을지 모르지만, 그의 급발진 덕분에 대한민국에서 파시즘적 선동과 폭력이 빠르게 득세할 수 있는 장이 열려버렸다. 극우 유튜버들, 극우 온라인 커뮤니티들, 그리고 극우 개신교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포섭하고 있다. 이들의 적은 종북좌파, 북한, 중국, 그리고 “페미니즘이라는 악한 사상”과 “동성애 조장 세력”이다. 탄핵의 배후에는 중국이 있으며, 탄핵을 막아내는 것은 곧 공산화를 막는 길이다. 동시에 탄핵을 막는 것은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 보수적 가치를 수호하기 위한 절실한 사명이기도 하다. 그렇게 그들은 ‘살기 좋은 나라’가 돌아오길 기원하면서 그들만의 이상적인 국가를 머릿속에 그려놓고 숭배한다. “이물질”들이 영구히 제거되는, 무섭도록 폭력적이고 배타적인 국가의 모습이다.
극우 세력이 확산시키는 음모론, 혐오, 폭력은 이미 위험수위에 도달했고, 한국 사회는 계속해서 분열되고 있다. 사람들이 법원에 난입해 폭력을 휘두르는 초유의 사태를 겪었는데도, 갈수록 많은 이들이 거짓 정보에 빠져 헌법재판소를 불신하고, 계엄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옹호한다. 그런데도 오히려 파시즘에 기생하는 정치인들이 있다. 극우 세력에 빌붙어 정치생명을 연장하려는 이들, 파시즘에 대적할 생각은 하지 않고 권력을 잡는 것에만 관심을 쏟는 이들.
파시즘의 토대를 무너뜨리는 길은 진실로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드는 것이다. 모두가 평등하게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고, 그 어떤 노동자도 차별받거나 착취당하지 않으며, 생계조차 이어갈 수 없는 불안정 노동이 사라지고,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기 위한 공공 지출과 재분배 정책이 의미 있는 효과를 만들어내는 나라 말이다. 반대로 친기업, 부자 감세, 성장 위주의 정책은 불안과 불평등을 고조시키고 더 많은 사람들을 극우화할 것이다. 앞으로 등장할 선거 공약을 잘 지켜보자. 파시즘에 기생하는 자들은 과연 누구인가?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184444.html#ace04ou
파시즘에 기생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세상읽기]
김정희원 |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교수 많은 학자들은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파시즘을 태동시킨다”고 주장해왔다.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혁명을 불러온다”는 주장의 반대쪽 극단이라
www.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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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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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는 자유시장과 규제완화, 재산권을 중시한다. 곧 신자유주의론자들은 국가권력의 시장개입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지만 국가권력의 시장개입은 경제의 효율성과 형평성을 오히려 악화시킨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준칙에 의한' 소극적인 통화정책과 국제금융의 자유화를 통하여 안정된 경제성장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또한 공공복지 제도를 확대하는 것은 정부의 재정을 팽창시키고, 근로의욕을 감퇴시켜 이른바 '복지병'을 야기한다는 주장도 편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자유무역과 국제적 분업이라는 말로 시장개방을 주장하는데, 이른바 '세계화'나 '자유화'라는 용어도 신자유주의의 산물이다. 이는 세계무역기구(WTO)나 우루과이라운드 같은 다자간 협상을 통한 시장개방의 압력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신자유주의의 도입에 따라 케인즈 이론에서의 완전고용은 노동시장의 유연화로 해체되고, 정부가 관장하거나 보조해오던 영역들이 민간에 이전되었다.
자유방임경제를 지향함으로써 비능률을 해소하고 경쟁시장의 효율성 및 국가 경쟁력을 강화하는 긍정적 효과가 있는 반면, 불황과 실업, 그로 인한 빈부격차 확대, 시장개방 압력으로 인한 선진국과 후진국 간의 갈등 초래라는 부정적인 측면도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신자유주의 [Neoliberalism, 新自由主義]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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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은 카드가 없다”, 굴욕 강요하다 협상 결렬… 미국 주도 세계 질서의 붕괴, 영원한 동맹은 없다.
약소국 대통령이 트럼프에게 납작 엎드리지 않을 때 감수해야 하는 것. - 슬로우뉴스.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slow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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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일이송_ _ 페북 250302
외로움이 문제다.
오늘 책을 읽는데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프랑스에서 극우 물결에 가장 저항한 지역일수록 가족 구조와 준거 집단이 잘 갖추어진 지역이라고 한다. 반면에 혼자 사는 사람이 많은 동북부 지역에 국민전선이 맹위를 떨쳤다고.
하기는 언젠가 이런 논문을 읽은 적이 있다. 15년 동안 네덜란드에서 '외로움과 급진우파의 상관관계'를 추적하는 논문이었는데, 결론은 외로움이 급진우파의 성장에 꽤 많은 영향을 줬다는 것.
비슷한 예로, 독일의 연방 가족부에서 자금을 지원한 Kollekt 연구 결과도 있다. 외로운 청소년일수록 음모론을 지지하고, 권위주의적 태도를 내면화하며, 기존의 레거시 체제를 부인하고, 정치적 폭력을 승인하는 경향이 짙다는 것이다.
미국의 한 리서치에서는 미국인의 17% 가량이 긴밀한 사회적 관계를 맺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결과가 나왔다. 외로운 사람일수록, 호화 인맥을 자랑하며 시끌법적하게 자기 자랑을 하던 민주당보다 트럼프를 지지했을 개연성이 높다는 분석이 더해진다.
일찌기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외로움과 전체주의의 관계를 추궁한 바 있다. 고립에 처하고 사회적 관계가 결여된 사람들이 전체주의 이데올로기에 자신을 복속시킴으로써 자존감을 발견하는 경로를 정확히 추적한 것이다. 이 위대한 사상가에 따르면 "세상에 전혀 속하지 않는 경험", 즉 그 고립무원의 외로움이 전체주의의 기원 중 하나다.
이때의 외로움은 고독과 다르다. 사회적 관계로부터 존재의 뿌리뽑힘, 그것이 외로움이다. 자본주의 체제가 심화됨에 따라 농민은 자신의 땅에서 뿌리뽑힌다. 노동자들은 기존의 대공장에서 비정규직으로, 긱 노동자로, 플랫폼과 디지털 노동으로 잘게 분화되고, 따라서 철저히 고립된다. 또 자본주의는 모든 사회적 관계를 붕괴시킨다. 우리의 삶을 재생산하고, 서로 기대고, 서로 상호부조하는 사회적 관계망이 시장 확대에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그 덕에 모든 관계망이 부서져 내린다.
농사 짓던 땅에서, 연대적 관계를 구축하던 노동 현장에서, 기존의 공동체적 관계에서, 공유지에서, 친밀성의 영역과 우정의 관계들에서, 심지어 국가의 공적 기능으로부터 지속적으로 뿌리뽑힌다. 자본 입장에서는 인간들이 뿌리뽑힐수록 저임금 노동력을 제공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또 시장 확대로 이윤을 축적할 수 있다. 자본주의 체제는 외로움을 끝없이 양산한다. 외로움이 곧 체제의 엔진인 것이다. 그리고 그 끝에는 극우 포퓰리즘과 파시즘이 우리를 기다린다.
가령, 한국의 청소년들을 보자. 각자 게임을 하거나, 능력주의 배양소로 전락한 학교에서 철저히 고립되거나, 서로의 목소리로 전화 통화하는 것조차 꺼려하며 메신저의 디지털 흔적을 주고 받는다. 그들의 개성과 그들의 정체성과 그들의 삶의 모험을 격려하는 사회적 관계와 준거 집단이 과연 존재하는가?
혹자는 10대 남성, 그리고 2030 남성의 우경화를 지적하며 인터넷 게임 문화를 이야기하지만, 중요한 건 게임이 아니라 고립이다. 여성들도 게임을 한다. 차이가 있다면 2030 여성들이 남성들에 비해 그나마 유기적으로 연결되기도 하지만 지난 세월 백래시를 경유하며 온라인/오프라인 상에서 끊임없이 연결되고 말을 섞고 사회적 관계를 유지해왔기 때문에 보다 관계지향적이고 민주주의 체제에 신뢰를 보낸다고 볼 수 있다.
현대 세계에서 사회적 관계란 공동체의 기반이자 민주주의의 종자가 된다. 이 말을 뒤집으면 민주주의 체제가 지금 위기에 처한 것은 사회적 관계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만일 한국의 2030 남성들이 정말로 우경화되었다면, 그것은 그들이 오갈 데 없이 "세상에 전혀 속하지 않는 경험"에 방치되고 있다는 뜻이다.
외로움은 원한을 품게 한다. 20세기 초반 막스 셸러는 극우 포퓰리즘의 정수를 '원한'이라고 보았다. 니체의 원한 개념을 사회적 원한 개념으로 전이시켰다. 한쪽에선 모든 이가 평등한 민주주의 체제라고 말한다. 그런데 다른 한쪽에선 부의 집중은 물론 주거, 교육 등 삶의 기반이 온통 불공평하다. 원한은 바로 이 간극에서 발생한다. 최근에 연구가들 중 일부는 이 개념을 받아안아 불평등을 가속화하는 자본주의 체제와 형식적 평등을 주창하는 자유민주주의의 탈구와 모순적 관계를 오늘날의 극우 현상의 원인이라고 지목한다.
한편, 막스 셸러에게 영향을 준 1930년대 네덜란드 학자의 <원한의 교리로서의 국가사회주의>라는 짧은 에세이는 더 깊은 통찰을 제공한다. 며칠 전 어렵게 PDF를 구해 읽고 무릎을 딱 쳤다. 사람들이 원한에 사로잡혀 그에 대한 책임을 유대인에게 돌린다는 것인데, 여기까지는 별다른 특징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 에세이는 한 발 더 나아간다. 원한과 그에 대한 대가로서 증오를 부추기는 파시스트들은 결코 그 원한을 제공한 사태를 해결하려 들지 않는다. 원한을 제공한 문제가 해결되면 원한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원한의 불이 계속 불타올라야 한다. 따라서 끊임없는 원한의 가동, 그것이 극우 포퓰리즘의 기원이라는 것이다.
각설하고, 추려서 이야기할 수 있는 대목은 이렇다. 극우 이데올로기는 외로운 사람들을 겨냥한다. 뿌리가 뽑혀져 원한을 태울 수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극우의 숙주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나은 상상적 관계를 맺을 수 없을 정도로 뿌리뽑힌 사람들에게 음모론과 가짜뉴스를 파종하고, 원한에 사로잡히게 하며, 그 원한의 대상을 여성, 성소수자, 이주민 같은 소수자들로 오인하게 만들며, 또 힘의 지배를 선전하고, '이생망'의 외롭고 고립된 무한루트에 갇히느니 이 하찮은 체제를 함께 불사르자고 설득한다. 사회가 부재하고 외로운 존재들이 양산된 세계, 그것이 바로 극우의 토양이다.
그러니까 외로움이 문제다. 사회의 붕괴가 문제다.
일요일 밤에 이렇게 넋두리를 하는 이유는 비도 추적추적 내리고 아무도 술 먹자고 하는 놈도 없어서 그런지 갑자기 막 외로워지고, 내가 극우 반동으로 흑화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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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shorts/uFM27dD-4W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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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R7b03lwQXr0&t=106s